[창-박강섭] 인질극과 'SNS 수다'

2014. 3. 15.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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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밤 서울 강남구 압구정역 인근 제과점에서 인질극이 발생했다. 강남 한복판에서 영화에서나 볼 법한 사건이 벌어지자 시민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 50여명이 인질범과 대치하는 3시간 동안 현장에 모여든 일부는 휴대전화를 꺼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릴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하기에 바빴다. 취재진보다 더 뜨거운 취재경쟁 탓에 서로 부딪쳐 넘어지기도 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고 SNS가 보편화되면서 네티즌들에 의한 사건사고 현장 생중계가 새로운 문화코드로 자리 잡고 있다. 지난해 7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발생한 아시아나 항공기 불시착 사고 때는 탑승객과 목격자들이 자신의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사고 현장의 급박한 모습이 담긴 사진과 영상 등을 올려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언론 취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들이 올린 재난 현장의 생생한 소식은 언론의 취재 대상이 되기도 했다. 비행기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승객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킨 아시아나항공 승무원들의 영웅적 행동이 세상에 알려진 것도 이들의 SNS를 통해서였다.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는 사건사고 현장의 생생한 소식을 언론의 취재만으로 커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SNS를 통한 네티즌들의 활약은 사회의 부정부패를 감시하고 고발하는 언론의 역할도 하고 있다. 개똥녀·땅콩남처럼 공공장소에서 동물의 배설물과 쓰레기를 치우지 않는 비도덕적 행위가 SNS를 통해 전파되면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게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사건사고 현장의 소식을 전하는 데도 지켜야 할 준칙과 예의가 있다. 2년 전 미국 맨해튼의 전철역에서 한인 남성이 한 흑인에 떼밀려 열차에 치여 숨진 사건이 있었다. 사고 당시 현장에 있던 뉴욕포스트 프리랜서 사진기자는 열차에 치이기 직전의 피해자 사진을 싣고 '이 사람이 곧 죽는다'고 제목을 달아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위기에 빠진 사람에게 구조의 손길을 보내는 대신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린 비인간적 '특종'에 대한 비난이었다.

압구정역 인질 사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연히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한 네티즌은 SNS에 올린 글에서 "범인이 인질을 붙잡고 칼로 위협하는 상황인데도 구경하는 사람들이 웃으면서 사진을 찍어 소름이 돋았다"고 말했다. 그는 "경찰이 사건 현장에서 나가달라고 하자 욕하면서 싸우려는 사람도 있었다"고 개탄했다. 무책임한 댓글도 많았다. 아이디 '어서와'는 "저거 빵 자를 때 쓰는 칼인데. 일반 날보다 무딘데…"라고 해 네티즌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사건사고 현장에서 스마트폰이나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이상한 습관에 익숙해졌다. 폭행 현장을 목격하고도 신고하거나 제지하기보다 스마트폰부터 꺼낸다. 지난 2일 밤 귀갓길에 영동고속도로 안산 구간을 달리던 중 대형트럭이 화재로 전소되는 사고를 목격했다.

그런데 사고가 난 하행선보다 반대편 차선이 더 막혔다. 상행선을 달리던 운전자들이 차를 세우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느라 길이 막힌 것이었다. 누구 하나 소화기로 불을 끄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상자가 있는지 관심을 갖는 사람도 없어 보였다. 중앙선 너머에서 불타는 트럭을 촬영하고는 자리를 뜰 뿐이었다.

그들은 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찍어 사이버 세상에 올리려 할까? 심리학자 장근영씨는 이를 'SNS 수다'라고 설명한다. "내가 오늘 출근길에 이런 일을 겪었다"라고 친구와 수다를 떠는 통로로 SNS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압구정동 인질 사건이 일어난 날 포털 사이트는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목격담과 댓글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인질 사건을 걱정하는 글이 대부분이지만 걱정을 빙자한 SNS 수다도 적지 않았다.

문제는 SNS 수다가 익명성을 무기로 온라인 인격 테러를 양산하는 '배설 문화'로 발전한다는 점이다. 개똥녀 사건이 대표적이다. '개의 똥'이라는 소재의 선정성 탓에 현장을 담은 동영상이 퍼지면서 주인공 여성의 인권을 송두리째 짓밟았다. 이번 인질 사건에서는 개념 없는 한 네티즌이 '빵 자르는 무딘 칼'을 수다라고 올렸다. 더 날카로운 칼로 피해자를 협박해야 구경거리가 된다는 의미로 읽히는 수다에서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세상에서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불구경과 싸움구경이라고 한다. 그건 우스개일 뿐이다.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걸린 현장에서 구조의 손길을 내밀지는 못할지라도 경찰이나 구조대의 활동을 방해하면서까지 카메라를 들이대선 안 된다. 그리고 범죄자라도 함부로 얼굴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는 등 초상권을 침해해서도 안 된다. 성숙한 SNS 문화 정착이 아쉽다.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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