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에 찬 너의 말, 그게 인종주의다

2014. 3. 4.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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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기획] '일베' 문지방 넘어 확산되는 폄하·증오의 언설들한국 지역주의 2000년대 이후 인종주의화 경향 뚜렷

인터넷 블로거 '라인강'의 블로그엔 '홍어'가 넘쳐난다. 그의 블로그에서 홍어를 검색하면 2013년부터 직접 쓰거나 퍼나른 122개의 관련 게시물이 뜬다. '전라도'를 키워드로 한 글은 더욱 많다. 모두 570개다. 블로그 소개글에서 그는 스스로 "우파이기는 합니다만 그저 맹목적인 우파는 아니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균형추가 되고자 하는 염원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고 적고 있다. 그는 그 균형추를 맞추는 일이 '전라도의 배후'를 드러내는 일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 것처럼 보였다.

"전라도 권은희에게 뒤통수 맞은 김용판"

게시물 제목만으로 그의 성향은 대략 짐작 가능하다. "전라도 권은희에게 뒤통수 맞은 강직한 김용판 경찰청장" "대한민국을 말아먹겠다는 전라도와 극좌 종북 세력" "전라도 천주교, 기독교는 섬노예 인정했나?" "전라도 출신 흉악무도한 살인마 유영철". 이슈와 시대를 가리지 않고, 대개 논지는 '전라도가 문제'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식으로 표현하면 '까보전'(까고 보니 전라도)인 셈이다.

'라인강'은 1990년대부터 인터넷 논객으로 활동해왔다. "우리나라를 개혁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반항했어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뒤 그의 '합리적' 노선에 변곡점이 생겼다. "엊그제까지 정권을 비판하던 사람들이 (DJ 정권에 대해선) 말을 안 해요. 누구겠어요?" 그가 물었다. "(그 사람들 출신지가) 다 전라도야. 돌겠더라고요. 난 그때 충격을 받았어요."

이후 그는 열렬한 호남 반대론자가 됐다. "우리는 그동안 김영삼씨나 전두환, 노태우 관련해선 떠들었잖아요. 현재는 이명박, 박근혜 욕하는데 왜 나는 (DJ, 노무현 욕을) 못합니까." 젊어서 독일에 자리잡아 수십 년째 독일에 살고 있는 라인강은 딱히 호남 사람을 만날 일이 없다. 개인적인 원한을 주고받은 일도 없다. 그가 거의 날마다 줄기차게 호남 사람들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올리는 이유는 하나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배후에 너무 전라도가 많다는 것이죠."

라인강만의 과업은 아니다. 일베로부터 확산된 특정 지역에 대한 '증오'와 '혐오'의 언어들은 이미 일베의 문지방을 넘은 지 오래다. 대형 포털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일상적으로 '혐오발언'(Hate Speech)을 만날 수 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문제가 돼온 혐오발언은 인종, 종교, 나이, 장애, 성적 지향 등을 근거로 선동적·모욕적·위협적이며 조롱 섞인 발언으로 개인 또는 집단을 공격하는 행위다. 국내에선 '혐오표현' '증오언설' 등으로 번역된다.

지난 2월 보도된 '신안 섬노예 사건' 뉴스에 달린 댓글들은 혐오발언의 특성을 선명히 드러낸다. 사건 자체에 경악하기보다 '호남 사람'에 대한 격렬한 혐오를 드러내거나 증오를 선동하는 말들이다. "라도 ×장생. 저 마을 사람들 할매·할배는 ×××× 죽이고 중×은 늙을 때까지 강제노동시키고 젊은 ×들도 강제노동시키고."(wkdd****) "전라도 시키들 끔찍하구먼."(ktw2****) "아따 홍어족 성지. 슨상님 탄생하신 신안이랑게."(wjda****)

국민 32% "영호남 갈등 증가했다"

증오는 원래 원시적 생존 본능에서 진화한 감정이다. 정글에서 뱀이나 사자를 만났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둘 중 하나다. '싸우거나 도망치거나'(fight or flight). 도망치는 이의 가슴이 두려움으로 가득 찬다면, 싸우는 이의 머리는 증오로 달아오른다. 더 잘 싸우기 위해 아드레날린이 뿜어져나오고 근육이 움츠러든다. 더 잔혹하고 대담해진다. 도처의 위험으로부터 허약한 몸뚱이를 지켜내기 위해 고대인의 뇌는 전략적으로 '증오'를 가꿨다. 싸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증오는 동정과 연민이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포용력을 차단한다.

증오하는 이들은 서로를 닮아간다. 최근 1~2년 새 인터넷상엔 영남 사람들을 비판하는 블로그도 늘고 있다. "이게 바로 개쌍도 기질이다" "경상도 사람들은 여러 정신병을 갖고 있는 정신병자" "역사 서적 보면 조작은 다 경상도 흉노족이 한 것". 극단적 언어는 반호남 성격의 글들과 다르지 않다. 2012년부터 경상도를 비판하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채아무개(39)씨에게 속내를 물었다. "요즘 들어 경상도 패권주의가 너무 심각합니다.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면서 다시 전라도를 말살시키려는 게 아닌가 싶단 말입니다."

전북 출신인 채씨는 "살면서 전라도 사람이어서 불이익을 받은 적은 없다"고 말했다. 몇 차례 사석에서 친구나 동료들과 호남 출신에 대한 편견으로 다툰 일은 있다. "그런 건 그냥 편견이니까 내가 잘하면 상쇄되는 거 아닙니까." 그럼 무엇이 그로 하여금 "경상도는 흉노족"이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갖게 만들었을까. "인터넷 게시판들에 홍어, 전라도, 그런 댓글들이 아주 도배가 돼 있잖아요. 심지어 광주(5·18 민주화운동)까지 희화화하고. 저도 자식 키우는 사람인데 미치겠더라고요. 이게 다 박정희를 비롯해 경상도 사람들이 만들어낸 논리거든요."

정치적 지역 갈등 구도를 상징하는 '3김 체제'는 끝난 지 오래다. 선거철마다 '지역주의 극복'을 외치는 목소리가 나온다. 18대 대선에선 '세대갈등론'에 '지역갈등론'이 밀렸다. 일단 세대가 바뀌며 '고향'의 개념이 희박해졌다. '호남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친다'는 편견의 진원지인 호남향우회의 유대도 약해졌다. < 문화일보 > 2월26일치 보도를 보면, 과거 호남 출신 인구 1150만 명 중 30%를 차지했던 호남향우회의 회원 수는 현재 10%도 되지 않는다.

설동훈 전북대 교수(사회학)는 "한동안 영호남 갈등이 완화됐던 것은 지역 갈등의 핵심에 있던 광주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며 상징적인 복권을 통해 맺혔던 감정이 풀어졌을 뿐 아니라, 역대 정부가 추진한 지역균형발전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1980년 광주의 참상을 직접 겪거나 지인을 통해 간접 경험한 호남 사람들의 정서는 '트라우마 상황'에 가까웠지만, 두 민주정부를 거치며 '일종의 푸닥거리'를 통해 '정서적 안정'을 얻었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국민은 영호남의 지역 갈등이 최근 들어 되레 증가했다고 느낀다. 국민대통합위원회의 '지역 갈등에 대한 심각성 인식' 조사 자료를 보면, 2005년에는 응답자의 11.3%만이 '영남 사람과 호남 사람의 갈등이 매우 심각하다'고 답했지만 2013년에는 그 수가 32%로 늘었다. '영남 사람과 호남 사람의 갈등이 큰 편'이라고 생각하는 인구도 응답자의 50~60% 수준에서 좀체 줄어들지 않고 있다. 설 교수는 "인터넷 공간에서 전라도와 경상도 등 특정 지역에 대한 폭언과 욕설이 난무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지역 갈등이 새로운 형태로 재생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평판 근거로 타자 증오하는 게 인종주의

최근 나타나는 지역주의는 2000년대 이전의 지역주의와 달리 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박해광 전남대 교수(사회학)는 "현실의 경제적·정치적 지역주의와 무관한 문화적 지역주의로, 인종주의의 다른 표현"이라고 말했다. "과거 지역주의는 패권주의의 경제적·정치적 자원을 독점하기 위해 생긴 것으로 비교적 이해관계가 명확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의 지역주의는 다릅니다. 특정 지역 사람들을 하위 주체, 열등한 인종으로 이해하는 것이죠."

인종주의는 원래 인종에 따른 생물학적 차이가 인간의 능력을 결정한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 인종차별의 역사 > 에서 저자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는 "타자의 행위가 아니라 속성에 대한 평판을 근거로 해서 타자로서의 타자를 증오하는 모든 형태"의 차별은 인종차별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썼다. 따라서 누군가 영호남 사람들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의 기질을 '종특'(인터넷 용어로 '종족 특성'을 말함)으로 꼽아 비판한다면 우리는 그를 '유사 인종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다.

왜 지금인가? 전문가들은 "꼬집어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을 아꼈다. 연민 없는 증오가 고개를 쳐드는 것은 주로 생존의 위기를 만날 때다. 21세기의 도시에서라면 일자리를 잃거나 채무에 시달리는 이가 많아질 때, 집단의 증오지수 또한 올라갈 테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사회과학부)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몰락한 자영업자와 약육강식의 시장에서 전쟁을 겪듯 살아가는 빈민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좌절과 분노 위에서 파시즘은 독버섯처럼 피어난다." 파시즘이 언제나 증오의 대상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린다는 점은 역사가 이미 증명하고 있다. 증오는 파시즘의 다른 이름이다.

증오의 결과에 대한 책임감 심어줘야

혐오발언은 그 자체로 해악이다. 더 우려할 것은, 오래 쌓인 증오는 반드시 밖으로 표출된다는 심리학적 견해다. 편견이 증오로, 증오가 폭력으로 이어지는 데는 그리 많은 걸음이 필요하지 않다. 다른 집단에 대해 편견을 구축한 이들은 먼저 '부정적 발언'을 지인들과 주고받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정도 수준의 편견을 넘어서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편견의 대상을 '회피'하거나 '차별'하는 데 이른다. 이 단계마저 넘어서면 '물리적 공격'이 나타나고 급기야 '몰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한국 사회의 지역 갈등이 '물리적 폭력'에 이를 가능성은 적다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그러나 혐오발언을 일삼던 일본의 극우 누리꾼 '넷우익'이 이후 혐한 거리시위까지 벌이는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으로 번진 것을 고려하면, 현 수준의 혐오발언들도 젊은 층의 유희라고만 보아 넘기긴 어려운 일이다.

증오를 녹이는 데 마법 같은 치료제는 없다. 증오의 원인과 결과를 직시하는 것이 먼저라는 건 공통된 의견이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증오, 증오의 대상인 가해자, 그리고 증오의 결과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 것이다. 우리가 증오의 결과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증오에 맞서 그것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 우리는 어쩌다 적이 되었을까 > 의 저자 로버트 스턴버그는 이렇게 적었다. 박해광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일베와 같은 젊은 세대들은 특히 5·18을 다른 인종, 다른 영토의 사건처럼 받아들입니다. 우리의 역사이고 우리의 영토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걸 환기할 수 있는 사회적 반성이 반드시 있어야겠고요. 역사 교육만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사회가 젊은 세대에 정의로움을 교육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결국 증오라는 원시적 감정을 조절하는 것은 정의와 합리라는 고등 신경계의 사고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인간은 그러기 위해 진화한 것 아닐까.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 참고 문헌

< 한국 사회의 차별 언어 > (이정복, 소통), < 인종주의 > (박경태, 책세상), < 우리는 어쩌다 적이 되었을까? > (로버트 스턴버그, 21세기북스), '다중전환의 도전과 비판사회학'(2013년 비판사회학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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