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흐린 겨울날 눈 대신 음표가 내린다면
[동아일보]
회색 얼굴로 잔뜩 흐린 하늘. 아무것도 내리지 않으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거워 보인다. 그저 '흐림'이라니. 눈, 비가 아니라면 음표라도 내려야 가벼워질 것 같다.
이런 겨울 하늘을 고개 젖혀 마주할 때의 사운드트랙으로 미국 록 밴드 익스플로전스 인 더 스카이의 '퍼스트 브레스 애프터 코마'만 한 게 없다. 사람 목소리 없이 전기기타와 베이스 기타, 드럼 연주만으로 9분 33초가 짜여진 이 곡은 '혼수상태 뒤의 첫 숨'이란 제목처럼 소생의 순간을 시간대별로 기록한 음악적인 병상일지 같다.
도입부. 맑은 전기기타 소리로 연주되는 싱글 노트는 4분 음표의 넓은 간격으로 고막을 두드린다. 혼수상태 환자의 심박계측기에 그려지는 일정한 그래프처럼. 이 사람의 소생이 확인되는 순간은 네 번째 마디와 일곱째 마디다. 심장박동 닮은 베이스 드럼이 멀리 침묵 쪽에서 페이드인 되고 기타의 무표정한 4분 음표 연쇄는 먹먹한 공중에서 문득 투명한 결정체가 하나둘 쏟아지듯 32분 음표 트레몰로로 바뀐다. 베이스 기타와 두 번째 기타가 가세하면서 환자의 동공에 점점 흐릿한 상이 맺힌다. 전기기타의 울림 효과는 만물이 아득하게 망막 앞으로 몰려드는 순간을 담채로 그려낸다.
2분 20초경, 8분 음표 분산화음으로 평화로워진 전기기타에 스네어 드럼의 힘찬 약동이 끼어들 때쯤엔 아마 가족들도 눈치 챌 것이다. 환자의 흐릿한 시각은 3분 11초쯤 두 대의 전기기타가 동시에 32분 음표 트레몰로로 음계를 오르내리며 왼쪽과 오른쪽 고막을 갈마들 때 흑백에서 컬러로 바뀔 거다. '그래, 여긴 지구야. 꽃이 피고 두 마리의 벌새가 날갯짓하는!'
매일 아침 기상이 이렇게 산뜻하게 아릿하고 투명하게 아찔하면 어떨까. 사실 그렇게도 싫던 아침이, 바뀐 환경 때문인지 요새 좀 좋아진 건 사실이다. 윤종신의 '환생' 대신 난 하루에 몇 번씩 '퍼스트 브레스 애프터 코마'를 듣는다. 전기기타의 아득한 공간감과 스테레오 효과 때문에 이 곡은 이어폰도, 거실 스피커도 아닌 헤드폰으로 들을 때 제일 짜릿하다.
익스플로전스 인 더 스카이 '디 어스 이스 낫 어 콜드 데드 플레이스' 음반 표지. |
이 곡부터 '우리만 있던 유일한 순간' '바다 바닥에서 보낸 6일'까지 아름답고 긴 연주곡 5개가 담긴 이 음반 표지에는 아주 작은 손 글씨로 한 문장이 반복해 쓰여 있다. 중얼거림처럼.(난 왜 오래전 어느 흐린 날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까)
'지구는 차갑게 죽은 곳이 아니야… 지구는 차갑게 죽은 곳이 아니야… 지구는…'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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