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안철수, 교과서, 양비론
양비론이라고 무조건 나쁜 건 아니다. 기실 세상사 대부분이 흑과 백으로 갈리지 않는다. 70 대 30, 60 대 40, 그도 아니면 지난 대통령 선거처럼 52 대 48로 나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의 문제에 이르면 사정이 다르다. 예컨대 지구는 둥글다가 52, 지구는 네모나다가 48이 될 수는 없다. 2014년 1월 현재 인류가 쌓아올린 과학적 성과에 따르면 지구는 둥글다가 100이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해외 언론에서는 김연아의 점프를 상찬할 때 'textbook-perfect(교과서처럼 완벽한)'라는 표현을 쓴다. 이처럼 교과서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무오류의 상징이다. 교과서에는 해당 학문의 주류적 견해로 공인받고, 장기간 체계적으로 검증된 '사실'만을 담아야 한다.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학교 현장에서 외면당한 근본적 이유는 학문적 통설에 어긋나는 '거짓'투성이여서다.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이런 교과서로 배웠다가는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낙제점을 받을 게 분명해서다. 교학사 교과서의 가장 큰 문제점은 '교과서답지 않은' 사실 왜곡과 오류다. 식민지근대화론 같은 역사인식도 문제이나, 이런 부분을 지적하는 일은 사치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교학사 교과서에 대한 무소속 안철수 의원의 발언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진원지가 된 지난 21일 제주 기자간담회 발언을 인용한다. "교과서 문제에 대해 저희는 아주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지금 대한민국을 반으로 분열시키는 문제에 대해 양쪽 다 문제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들을 내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틀리다고 보는 생각이 우리나라를 둘로 쪼개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저희의) 문제인식 자체가, 한 분의 생각과 또 다른 분의 생각이 다같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부분에서 생각을 교환하고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안 의원 말대로라면 교학사 교과서는 기타 7종의 한국사 교과서와 '생각'만 다를 뿐 '사실'은 틀리지 않은 듯하다. 과연 그럴까. 교학사 교과서는 당초 '한국인 위안부는 일본군 부대가 이동할 때마다 따라다니는 경우가 많았다'고 기술했다. 강제로 끌려다닌 사실을 증언한 피해 할머니들이 생존해 있는데도 거짓말을 늘어놨다. 비판에 휩싸이자 '…강제로 끌려다니는 경우가 많았다'로 수정했지만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다. '…경우가 많았다'면 스스로 쫓아다닌 경우도 있었다는 얘긴가. 다른 생각은 공존하거나 합의에 이를 수 있지만, 사실과 거짓은 그럴 수 없다. 사실은 취하고, 거짓은 버려야 한다.
대한민국이 반으로 분열되고 둘로 쪼개졌다는 말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교학사 교과서 채택률은 0%대다. 지역별 차이도, 공·사립별 차이도 없다. 이 교과서는 대부분 학교에서 역사교사들이 추천하는 후보 3순위 안에도 들지 못했다. 교육부가 온갖 꼼수로 엄호하고 새누리당이 측면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도 이런 결과가 나왔다. 학생과 교사, 학부모가 합리적 상식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안 의원이 언급한 대한민국의 분열은 실체가 없다. 종합편성채널 등 친여보수 언론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한 원로 한국사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교과서 문제에 관한 한, 안 의원은 정치지도자에게 필수인 '핵심 파악 능력'이 부족해 보인다. 중요한 문제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으면 발언을 자제하는 게 옳다.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것은 진실된 태도가 아니다."
신당 창당에 나선 안 의원은 새누리당과 민주당을 한데 묶어 낡은 기득권 정당으로 비판하고 있다. 여당도 아니고 야당도 아니며,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라는 자리매김이 '새 정치'인지 회의적이다. 물론 < 안철수의 생각 > 과 '정치인 안철수의 현실'은 다를 터이다. 하여, 양비론을 제3지대 신생 정당의 생존전략으로 눈감는다 치자. 그렇다 해도 미래세대에게 사실을 가르치는 교과서는 양비론 소재가 될 수 없다. 이 문제까지 줄타기를 했다가는 용기있게 상식의 편에 선 시민들에게 등돌리는 실책이 될 것이다.
안 의원에게 교학사 교과서 근·현대사 부분을 읽어보길 권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어법을 빌리면 '읽어봐서 아는데' 금세 독파할 수 있다. 딸이 고교 시절로 돌아가 이 교과서로 공부해도 되겠다 싶으면 기존 발언을 고수해도 좋다. 그렇지 않다면 취소하시라. "좀 더 큰 범위에서 이야기한 것뿐"이라며 얼버무리거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빈소를 찾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 김민아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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