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끓는 청춘', 일진이 된 박보영 뿐인가?

2014. 1. 20.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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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이학후 기자]

▲ < 피끓는 청춘 >

영화 포스터

ⓒ 담소필름,롯데엔터테인먼트

< 피끓는 청춘 > 의 시간 배경은 1982년이다. 이 시기는 12·12 쿠데타로 국가 권력을 찬탈했던 전두환 일당이 5공화국을 출범시킨 직후였다. 정권의 정통성이 없었던 신군부 정권은 자신들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목적으로 문화 통제 수단을 풀어주었다. 이른바 3S(섹스, 스크린, 스포츠)란 유화 정책의 결과로 1982년에는 프로야구가 시작했고, 극장에는 < 애마부인 > 이 걸렸다. 그리고 유신시대부터 이어졌던 통행금지가 해제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이 무렵 학생들이 얻은 건 '두발 자유화'와 '교복 자유화'다. < 피끓는 청춘 > 은 두발 자유화를 얻었던 1980년대 마지막 교복 세대였던(교복 자유화는 1983년부터 시행되었다) 1982년의 충청도 학생들을 주인공으로 잡았다.

▲ < 피끓는 청춘 >

영화의 한 장면

ⓒ 담소필름,롯데엔터테인먼트

서울에서 온 소희(이세영 분)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중길(이종석 분)이지만 서울 깍쟁이답게 그녀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릴 적 친구였던 중길을 짝사랑하는 영숙(박보영 분)은 그에게 애정공세를 퍼붓지만, 중길은 외면한다. 광식(김영광 분)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고 중길만을 바라보는 영숙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다.

< 피끓는 청춘 > 은 충청도 일대를 접수한 홍성농고 여자 일진 영숙, 수많은 여학생을 울린 홍성농고 전설의 카사노바 중길, 서울에서 홍성농고로 전학 온 청순가련한 여고생 소희, 홍성공고의 넘버원으로 영숙 등과 충청도 일대를 주름잡는 광식을 주요 인물로 삼았다.

영숙, 중길, 소희, 광식의 물고 물리는 인물 관계를 다룬 < 피끓는 청춘 > 의 관전 포인트는 의외성이다. < 과속스캔들 > 로 '국민여동생'의 인기에 올랐던 박보영은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시도한다.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구사하면서 컴퍼스로 상대를 제압하는 여자 일진 영숙은 박보영이 출연했던 다른 영화의 인물들과 확연히 다르다. 소녀의 이미지를 벗어나 무수한 똘마니를 거느린 여자 일진 영숙으로 변모한 박보영을 보는 것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재미다.

< 피끓는 청춘 > 은 왜 1980년대로 가야 했을까?

▲ < 피끓는 청춘 >

영화의 한 장면

ⓒ 담소필름,롯데엔터테인먼트

복고 코드 역시 또 다른 재미다. < 써니 > 가 촉발한 복고의 유행은 이후 < 건축학개론 > < 미나문방구 > < 전국노래자랑 > 등으로 확산했다. 드라마에선 < 응답하라 1997 > , < 응답하라 1994 > 가 큰 인기를 끌었다. 대중문화는 그야말로 복고의 전성시대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 피끓는 청춘 > 은 이들 작품에 뒤질세라 복고의 물건을 열심히 진열한다. 산울림의 '개구쟁이'와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가 울리는 가운데 80년대 충청도 학생들의 통학수단이었던 통학열차와 데이트 장소였던 빵집이 영화의 주요 공간으로 등장한다. 또한, 당시의 중국집과 극장도 나온다. 지금은 사라진 교련 수업과 그 시절 학생들의 소풍 등은 거쳐온 이에겐 추억을, 모르는 이에겐 신선함을 준다. 당시에 유행한 맥가이버칼이나 롤러스케이트, 그때 유행하던 메이커가 새겨진 운동화와 양말 등의 소품도 '추억을 방울방울' 환기해준다.

▲ < 피끓는 청춘 >

영화의 한 장면

ⓒ 담소필름,롯데엔터테인먼트

4명의 연애 전선이 영화의 주요 흐름을 형성하지만, 중길의 성장담에 가깝다. 흥미롭게도 < 피끓는 청춘 > 은 1980년대 할리우드의 인기작 < 사관과 신사 > 와 연관성이 깊다. < 사관과 신사 > 에서 보여주었던 아버지와 갈등을 빚는 아들의 반발과 떠나버린 엄마에 대한 원망 등은 < 피끓는 청춘 > 에서 유사하게 재현된다. 해군학교 사관생도생이었던 잭 마요(리처드 기어 분)의 성장과 중길의 성장은 묘하게 겹쳐진다.

< 사관과 신사 > 에서 다른 이들에게 (그런) 척하고 살았던 남자가 진실한 사랑 앞에서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대목은 중길과 영숙의 관계와 다를 바 없다. 심지어 < 피끓는 청춘 > 의 엔딩 장면은 < 사관과 신사 > 의 엔딩 장면을 통째로 가져왔다. 그런데 < 사관과 신사 > 의 주제곡인 'Up where We belong(업 웨어 위 빌롱)'이 아닌, 1980년대의 다른 영화인 < 마네킨 > 의 주제곡이었던 'Nothing's Gonna Stop Us Now(나씽즈 고나 스탑 어스 나우)'를 사용한 부분은 의아스럽다. 아마도 "아무도 우릴 멈출 순 없다"는 가사가 < 피끓는 청춘 > 에 더 어울린다고 여긴 모양이다.

▲ < 피끓는 청춘 >

영화의 한 장면

ⓒ 담소필름,롯데엔터테인먼트

요즈음의 한국 영화에서 학원이란 무대는 1970년대 명랑한 웃음을 준 < 얄개 > 시리즈와 1980년대 입시 지옥을 다룬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 , 1990년대 공포물로 그려진 < 여고괴담 > 의 공간과는 완전히 다르다. < 두사부일체 > < 신라의 달밤 > < 화산고 > 등은 학원을 폭력의 장으로 변화시켰다. < 폭력써클 > 과 < 바람 > 은 이들의 적자다. 왕따 문화와 연결되었던 < 싸움의 기술 > 이나 < 방과후 옥상 > 은 서자 격으로 볼만하다. 이를 계승한 < 피끓는 청춘 > 의 학원에서는 폭력의 재미 외에 다른 것을 찾기 힘들다.

< 피끓는 청춘 > 은 복고 말고는 왜 1980년대로 가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미 1980년대의 복고 물건들의 전시회는 십여 년 전에 < 품행제로 > < 몽정기 > < 해적, 디스코왕 되다 > 등으로 끝낸 바 있다. 이들에 비해 < 피끓는 청춘 > 이 나아진 점이 없다. 그저 학원을 폭력의 장으로 소환한, < 써니 > 의 칠공주파의 확장판 정도의 의미뿐이다.

이것은 <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 > 에서 김경욱 영화평론가가 언급한 "(1980년대) 정치, 사회적 흔적을 드러내지 않으려면 주인공들은 어른이 아니라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년들이어야 한다. 억압과 폭력으로 얼룩진 그 시대가 소년들의 시선을 통과하면서 '향수'라는 깔대기로 사라져버린다"는 지적과 부합한다.

< 변호인 > 을 연출한 양우석 감독은 1980년대를 일컬어 산업화와 민주화의 밀도가 가장 높았던 시기라 밝혔다. 그는 부모세대가 그런 1980년대를 어떻게 넘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런 치열한 1980년대를 살았던 청춘 세대를 일진과 카사노바의 로맨스로만 풀어가는 < 피끓는 청춘 > 은 퇴행적인 도피성 영화에 가깝다. 과연 그 시절을 살았던 '피끓는 청춘'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주먹과 연애뿐일까? 그 시대의 청춘을 다른 형태로 다룬 영화가 나오길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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