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아 "내 사건 유난히 잘 잊혀지질 않아"..해외 봉사활동 현장 인터뷰

미얀마 2014. 1. 20.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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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미얀마 양곤 외곽 소도시인 바고의 빤찬꽁 보육원. 한국의 대학생과 중·고등학생 봉사단원들의 지도로 아이들이 한국 동요인 '올챙이송'을 따라부르며 신나게 율동을 하고 있었다. 그 한쪽에 이른바 '신정아 사건'의 당사자인 신정아씨(42)가 있었다. 신씨는 쏟아지는 뙤약볕 아래 붓을 들고 구슬땀을 흘리며 아이들과 함께 벽화작업 중이었다.

동국대 교수 겸 큐레이터로 활동하던 신씨는 2007년 예일대 학력 위조 파문과 정권 실세와의 염문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 사건으로 1년6개월을 복역한 뒤 2011년 자전 에세이 < 4001 > 을 출간해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신씨는 불교계 국제개발협력 비정부기구(NGO)인 '하얀코끼리'(이사장 영담 스님) 문화봉사단 자원봉사자 10여명과 함께 이곳에 왔다. 120여명의 어린이들이 생활하는 보육원에서 14일부터 3박4일간 숙식을 함께 하며 벽화 그리기와 한글, 동요, 전통놀이 등 한국문화를 가르쳤다. 하얀 코끼리는 신씨의 주선으로 출판사 비룡소의 지원을 받아 한국문화를 소재로 한 어린이책 1000권을 이 보육원에 기증했다. 미얀마 전통 선크림격인 '다나카'를 얼굴에 바른 신씨는 "함께 그림을 그리니 아이들도 좋아하고 나도 오랜만에 아주 유쾌했다"며 미소지었다. 흰색 벽에 조그맣게 그린 탈, 첨성대, 십이지신상 등의 한국 전통문양이 예뻤다. 빤찬꽁 보육원과 양곤시내의 한 식당에서 곤혹스러워 하는 신씨와 어렵게 대화를 나눴다.

-봉사단으로 와 있는 것을 전혀 몰랐다. 어떻게 봉사단에 참여하게 됐나.

"하얀코끼리 이사장 영담 스님의 권유로 지난해부터 미얀마 봉사단에 합류했다. 영담 스님은 사건 당시 동국대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이었다. 당시에는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나중에 모두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그 중에 영담 스님도 계셨다. 참회를 하려거든 직접 이웃의 어려움에 뛰어드는 봉사활동을 하라고 하셨다. 앞으로도 기회가 주어지면 계속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일도 하고 싶다. 그런데 이런 일이 언론에 보도돼 봉사단체에 되레 누가 될까봐 조심스럽다."

-어떤 일을 했나.

"지난해에 막연한 마음으로 따라왔다가 벽화를 그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계속 비가 와서 아이들과 놀아주기만 하고 갔다. 이번에는 봉사단원들이 보육원 외벽에 깨끗하게 페인트칠을 하면 내가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그렸다. 서울에서 한국의 대표적 문양을 준비해왔다. 아이들이 스스로 그릴 수 있도록 물감 재료는 현지에서 구했다. 아이들의 의견대로 문양을 고르고 위치를 정했다. 아이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물감 배합하는 법, 그리는 법 등을 가르치면 금방 따라해서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다.

-어려움은 없었나.

"잠자리가 좀 불편했지만 견딜만 했다. 통역이 있어도 그림을 지도하는 데는 대화가 필요 없다. 눈빛으로 다 통한다. 아이들은 어느 나라나 맑고 순수하다. 짧은 시간에 아이들과 흠뻑 정이 들었다. 얼굴의 다나카는 아이들이 발라줬다. 마지막 날에는 헤어지기 싫어서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눈물이 났다. 내가 오히려 마음의 힘을 얻고 간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

"서울에서 특별히 하는 일없이 평온하게 지내고 있다. 그동안 여기저기 몸이 아팠는데 지금은 많이 회복됐다. 여러가지 책을 읽고 사람들을 만났지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사건 후 7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대인 콤플렉스와 자격지심은 남아 있다. 그런 부분은 여전히 속상하고 힘들다. 결국 스스로의 치유가 중요하다고 본다. 결국 내 마음이 이겨내야 한다. 이제는 모든 분들과 화해하고 새롭게 일을 찾고 싶다."

-애초 문제가 된 학력위조에 대해 뒤늦게 예일대가 동국대에 사과한 것으로 안다. 예일대와 동국대의 소송은 어떻게 됐나.

"결과적으로 내가 학교와 관련된 브로커에게 속아서 벌어진 일이다. 모든 것이 내 실수였다. 예일대 로스쿨은 대통령을 배출한 곳이다. 소송에서 이기기가 쉽지 않다. 억울하지만 1, 2심 후 포기해 버렸다."

-책 < 4001 > 은 많이 팔렸나.

"글쎄, 그 부분은 출판사에서 알아서 한다. 처음부터 모든 게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내 일기장을 토대로 했지만 출간하는 과정에서 출판사에게 너무 끌려다녔다. 지금은 책을 낸 것을 후회한다. 지금처럼 마음의 여유가 있었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 종편 채널의 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활동 재개를 추진하다가 무산됐는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방송 쪽에서 출연 요청이 있어서 망설이다가 응했는데, 결국 틀어졌다. 내 사건이 유난히 사람들에게 잘 잊혀지지 않는 것 같다.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아직은 일을 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계획은.

"이런 활동을 통해 자비와 이타행을 강조하는 불교를 많이 배우고 싶다. 여전히 일을 하고 싶다. 추진하는 일이 없지는 않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실수 없이 열심히 할 생각이다. 그러니 왜곡된 기사로 비자발적 실업자에게 일할 기회를 가로막지 않았으면 한다.(웃음)"

신씨는 아이들과 어울릴 때는 무척 행복해보였다. 봉사단의 실질적인 리더로서 명랑하고 쾌활하게 봉사단원들을 이끌었다. 하지만 부정적인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인터뷰에서는 침묵하거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무척 조심했다.

< 미얀마(바고)|글·사진 김석종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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