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T '한국전쟁 반역자 몰려 억울한 옥살이' 홍윤희씨 대서특필

노창현 2014. 1. 5.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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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반역자에서 애국자로'

뉴욕타임스가 한국전쟁중 인민군에서 탈출해 국군에 정보를 제공하고도 간첩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한 재미동포 홍윤희(83)의 기구한 사연을 대서특필했다.

뉴욕타임스는 4일 "한때 반역자로 몰려 징역까지 산 홍윤희 씨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고, 애국자의 반열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3일 밤 인터넷판 톱에 올랐고 4일자 A섹션 5면 톱기사로 게재돼 눈길을 끌었다.

홍윤희 씨는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서 탈영해 인민군에 입대한 혐의(국방경비법 위반)'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무기징역을 거쳐 징역 5년으로 감형돼 옥살이를 했다. 그러나 62년만인 지난해 2월 청구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현재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홍씨의 기구한 운명은 6.25 발발직후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몰래 서울을 빠져나간후 한강다리마저 폭파해 수많은 서울시민이 고립되면서 시작됐다. 당시 육군 하사였던 그 역시 서울에 갇혀버린 것이다.

북한군이 진주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지하 공산당원이었던 친구의 제안으로 북한군에 자원해 전선에 투입되면 국군에 귀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자신이 당시 북한 부수상 홍명희의 동생이라는 거짓말로 북한군에 합류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홍명희의 먼 사촌뻘이었다.

그해 8월 북한군의 압도적인 우세속에 전선이 부산 김해 일원으로 좁혀졌을 때 그는 김일성이 9월 초 총공세를 통해 전쟁을 끝내려 한다는 정보를 얻게 됐다. 그는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더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만일 북한군이 승리하면 홍명희 동생이라는 거짓말이 들통나고 나도 끝장이었다"고 말했다.

8월 31일밤 몰래 빠져나온 그는 이튿날 아침 국군에 귀순, '중요한 정보'가 있다고 알렸다. 그리고 미군정보장교에게 '인민군 총공세' 계획을 전달했다. 그러나 9월 11일 전 소속 부대에 복귀한 그는 모진 시련을 맞게 된다. 헌병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 취조끝에 간첩죄로 군사재판에 회부된 것이다.

전쟁중 즉결 처형당할 수도 있는 위기에서 다행히 안면있는 변호인의 도움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그는 5년을 복역하고 1955년 풀려났다. 이후에도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살았던 그는 1973년 박정희 유신치하에서 다시 체포될 것이 두려워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해 슈퍼마켓과 식당 등을 운영하며 살았다.

홍윤희 씨는 "그 시절엔 가족이 고통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내에게조차 내 과거를 말 할수 없었다"면서 "난 1950년에 제공한 정보가 잘못됐기 때문에 옥살이를 한 줄 알았다"고 말했다.

1994년 그는 한국전쟁에 관한 미군사료집에서 김성준이라는 북한군 소령이 귀순후 1950년 인민군 총공세의 정보를 제공했다는 내용을 접하게 됐다. 또한 한국의 군사책자에서도 김성준의 정보로 미8군이 적군의 공격에 잘 대비할 수 있었다는 내용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김성준이란 인물에 대해 자료를 더 확인한 결과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가 정보를 제공했다는 시점에 이미 인민군 총공세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더욱이 김성준이 1953년 포로교환을 통해 북한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인민군 총공세 정보는 내가 제공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2000년 한국의 군사편찬연구소는 김성준 소령이 총공세 정보제공자로 기록된 것은 실수라고 인정했다. 홍윤희 씨는 자신의 군사재판기록에서도 오류를 찾아냈다. 그가 1950년 9월 3일 한국군과 전투를 벌인 것이 반역죄로 적용된 내용이었다. 그때는 이미 국군에 귀순한지 사흘이 지난 뒤였다.그같은 오류에도 불구하고 2007년 한국의 대법원은 홍윤희씨가 청구한 재심을 증거부족으로 기각했다. 그로부터 4년뒤 홍 씨는 서울의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집에서 1954년 로이 애플맨 중령이 한국전쟁사의 일부를 집필하면서 '미정보국이 1950년 9월 1일 홍씨가 귀순해 인민군총공세 정보를 제공해 도쿄의 극동사령부에 전달했다'는 메모를 발견했다.

'홍의 정보'라는 메모에서 애플맨 중령은 '더 이상 그의 기록을 찾지 못해 처형된 것으로 생각했다. 홍씨의 역할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출판마감에 쫒겨 대신 김성준 소령을 인용했다'고 언급했다 .

애플맨 중령의 메모는 이듬해 재심 청구를 통해 그가 명예회복을 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 당시 재판부는 "헌병수사관의 피의자 신문조서가 공소사실에 대한 증거가 되지 못하고, 유죄를 입증할 다른 증거도 없어 무죄를 선고한다"며 "이번 선고가 피고인에게 위로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는 그러나 홍 씨의 무죄는 절반의 성공에 불과하다면서 "난 지난 63년간 반역자라는 오명을 쓰고 살아왔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나라를 도왔다는 진실을 입증할 것"이라는 그의 다짐을 전했다.

한국전참전용사로 TV다큐프로를 통해 잘 알려진 이상엽 씨는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홍윤희 씨는 한국전쟁에 관한 이야기중에서도 정말 희귀한 경우"라면서 "전쟁의 고비에 그가 제공한 정보는 UN군에 중대했다"고 평가했다.

한편 군사편찬연구소는 UN군이 자체 정보를 통해 북한군의 총공세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면서 홍씨의 기여도를 평가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홍 씨는 "수천장의 전쟁포로 문서들을 확인했지만 63년전 당시 전선에서 빠져나와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한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면서 "UN군은 구한 것은 나라고 확신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robi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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