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스크린]영화는 영화일 뿐, 의미없는 논쟁 없기를

2013. 12. 24. 15:5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New

제목

변호인

영제

The Attorney

제작연도

2013년

감독

양우석

출연

송강호_송우석, 김영애_최순애, 오달수_박동호

등급

15세 관람가

상영시간

127분

개봉일

2013년 12월 18일

이 영화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자. 영화 < 변호인 > 은 시작부터 입장과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즉, 이 영화는 실제 사건과 인물로부터 모티브를 가져왔으나 어디까지나 가공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것이 한 때 실존했던 인물 노무현을 스크린에 '본격적으로' 소환한 첫번째 상업영화의 입장이다(그간 < 광해 > 등을 통해 이미 여러번 소환되었으나 어디까지나 상징으로 기능했다).

< 변호인 > 에게 너는 왜 올리버 스톤의 < 닉슨 > 이 아니냐 비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간 노무현의 삶과 카메라 사이에 적정한 긴장과 거리감을 유지하며 논쟁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텍스트가 언젠가는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 변호인 > 이 노무현을 실명으로 거론하는 전기 영화가 아니라는 것은 현 시점이나 시장성을 고려해볼 때 세련된 선택이다. 동시에, 그 시작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지지자와 반대파의 틈바구니에서 거대 서사 속 캐릭터로 소비되었던 노무현의 삶을 감안해보면 아이러니한 노릇이기도 하다. 그는 고인이 되어서도 이야기 안에서 캐릭터의 형태로만 환영받는다.

실존 인물을 다룬 기획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선택과 집중이다. 그의 인생 가운데 어느 시점을 다루느냐의 문제다. 어느 시점의 노무현을 다루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성격과 장르, 영화가 취할 전략은 완연히 변모할 수 밖에 없다. < 변호인 > 은 부림 사건을 선택했다. 돈 잘 벌던 세무 전문 변호사가 사회에 각성하고 정치적 아이콘으로 거듭나는 출발점이다.

그 시점 노무현의 이야기를 상업영화 기획의 틀 안에서 상품으로 풀어내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이란 그리 다양하지 않다. < 변호인 > 은 유사 슈퍼히어로물이다. 왕따 피터 파커는 거미에 물려 큰 힘을 얻고 방종하지만 삼촌의 죽음으로 각성한 뒤 거듭나 그린 고블린과 싸운다. 무기상 토니 스타크는 재력과 재능을 믿고 삶을 즐기지만 자신의 무기가 어디서 어떻게 쓰이는지 목격하고 각성한 뒤 거듭나 슈트를 입고 아이언 몽거와 싸운다. 고졸 변호사 송우석은 속물적 성공을 통해 꿈을 이루지만 국밥집 아들의 실종과 재판을 겪으며 각성한 뒤 거듭나 군사정권과 싸운다.

이와 같은 전략은 관객이 < 변호인 > 의 이야기에 몰입하는데 나쁘지 않은 토대가 되어준다. 그러나 단점 역시 동반한다. 송우석의 대척점에 서 있는 차동영이 슈퍼히어로 서사의 슈퍼빌런으로 기능하다보니 지나치게 평면적인 절대 악으로만 그려진다는 사실이다. 차동영은 잘 만들어진 악당이 아니다. 그냥 나쁜 놈이다. 차동영이라는 인물의 맥락이 아버지의 죽음에 관련한 대사를 통해 느슨하게 노출되지만 충분치 않다. 악당의 합리가 온전히 보이지 않는다. 차동영은 < 어퓨굿맨 > 의 제셉 장군이어야 했으나, 흐릿한 위압감만을 걸친 '그냥 악당'으로 남는다.

속물적 가치를 지향하던 전반부의 송우석이 소시민으로서의 자연스러움을 보여주는 반면, 갑옷을 두른 듯 행동하는 후반부의 송우석이 다소 작위적으로 보이는 것 또한 단점이다. 전개만 따지고 보면 전반부와 후반부의 송우석 사이에는 그에 걸 맞는 인과관계가 부재한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저 둘 사이의 이음새에 별 다른 흠결이 보이지 않는다. 어찌된 일일까. 그것이 영화 < 변호인 > 의 가장 큰 미덕이다. 그 이음새가 다름 아닌 송강호이기 때문이다.

< 변호인 > 에는 빼어나게 훌륭한 각본도, 그것을 무마할 만큼 박력 있는 연출도 없다. 다만 송강호가 있다. 송강호가 연기하는 송우석이 술에 취해 "내가 살아온 세상은 데모 몇 번으로 바뀌는 그런 세상이 아니야"라며 비틀대는 순간을 상기해보자. 그것은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이 확신에 찬 눈빛을 가장하며 내 안의 불안을 큰 소리와 자기연민으로 무마해버리는 순간이다.

저 인물이 지금 품고 있는 감정의 맥락과 토대, 나아가 인생을 감지할 수 있게 만드는 연기는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컷 한 번을 끊지 않은 채 수 분에 걸쳐 변론을 하는 대목에서, 87년의 후기를 다루는 마지막 컷에서 또한 송강호의 표정이 빛을 발한다. 송강호의 송우석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송우석이 대한민국 헌법 1조를 외치는 장면을 가정해보자. 세상에는 송강호만이 채울 수 있는 백지가 있다. 나는 그 영화를 창피하고 간지러워서 끝까지 보지 못했을 것이다.

< 변호인 > 은 잘 만들어진 상업영화다. 특히 그간 한 편의 영화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완성도는 물론 아무런 전략과 비전도 없이 낭만과 분노만을 추동하며 과거를 소환했던 영화들의 전사, 이를테면 < 26년 > 같은 경우를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사실 < 변호인 > 을 감상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단점은 영화 외부로부터 발견된다. < 변호인 > 의 단점은 세상에 일베가 있다는 것이다. < 변호인 > 의 단점은 세상에 여전히 비뚤어진 정의감만으로 모든 걸 재단하며 민폐를 끼치는 열성 노무현 팬덤이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공모자이자 공생관계인 저들은 < 변호인 > 과 관련해서 역시 아무런 의미없는 소음만을 양산하며 논쟁의 가치가 없는 논쟁의 장을 세워 진영의 외벽을 쌓는데 골몰할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는 건 피곤한 노릇이다. 그 난잡한 판에 억지로 소환되는 건 더욱 끔찍한 일이다. 이 재미있는 영화가 재미를 찾는 관객들과 불필요한 소음 없이 만나고 헤어지길 기대한다.

허지웅 < 영화평론가 >

-ⓒ 주간경향 & 경향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향신문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주간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