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에게 장애가..남자친구는 연락을 끊었다

2013. 11. 28.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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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자궁 3cm 열려 출산이 시작됐을 때 근처 병원이 받아줘

"부모에게 알릴 수도 없고" 20일만에 아이 버린 미혼모

베이비박스, 버려지는 아기들 ② 미혼모의 속사정

버림받은 아기 뒤엔 버림받은 엄마가 있다.

태어날 아기에게 장애가 있을 수 있다는 말에 "아이가 생겼으니 결혼하자"던 남자친구는 연락을 끊었다. 임신 7개월째였다. 입덧이 심해 직장도 그만둔 뒤였다. 직장을 그만둘 당시에는 임신 사실도 몰랐다. 몸이 안 좋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입덧이었다. 아이를 낳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병원들은 만삭인 임신부를 다른 병원으로 떠넘기기 바빴다. 장애가 의심되는 아이는 출산 과정에서 숨지거나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다 출산 전날 대학병원까지 찾았으나 거기서도 다른 병원을 알아보라고 했다. "아기 낳으러 광주에서 서울까지 가란 말이에요? 가다가 아이가 나오면 어떻게 해요?" 박민정(가명·26)씨의 항의는 허공을 맴돌았다. 결국 자궁이 3㎝가량 열려 사실상 출산이 시작됐을 때에야 비로소 근처 병원이 박씨를 받아줬다.

한쪽 뇌가 발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검진을 받은 아기가 세상으로 나왔다. 겉보기엔 별문제가 없었다. 아기를 받아준 병원에서도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다고 했다. 다행이라며 아이를 안고 퇴원했지만 곧 눈앞이 깜깜해졌다. 홀로 감당한 임신과 출산 과정도 힘들었지만, 모아둔 돈은 병원비와 생활비로 금세 날아갔다.

장애아 태어날 수 있단 말에…이혼남이라고 속여 놓고…연락을 끊어버린 아이 아빠들

미혼모 열중 넷은 부모에 쉬쉬알려도 냉담한 반응 많아

홀로 키우자니 돈이 필요하고돈을 벌자니 아기 못 키워마지막 선택은 결국 베이비박스

부모에게 출산 사실도 알리지 못하고 지인의 집에 머물며 전전긍긍하던 박씨는 결국 아이를 안고 서울로 향했다. 관악구 난곡동 주사랑공동체교회의 '베이비박스'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지난 13일, 딸아이가 태어난 지 20여일 만이었다. 박씨는 "병원에서든 어디에서든 여자에게만 책임을 지라고 한다. 자기 아이가 아니라도 키워 줄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해 아이를 데려가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미혼모들은 아기 때문에 자신의 부모에게 버림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아기를 버리는 모순에 빠진다. 베이비박스를 찾은 미혼모들 대부분은 부모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출생신고를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지난 6일 오후 5시께, 태어난 지 나흘 된 아들을 안고 베이비박스를 두드린 서윤희(가명·36)씨는 직장에 다니며 여든을 훌쩍 넘긴 아버지를 홀로 간병하고 있다. 아이 아빠는 이미 결혼한 남자다. 서씨는 그가 이혼했다는 말을 믿고 사귀었지만, 그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자 연락을 끊었다.

서씨는 무엇보다 아버지가 두려웠다. 유부남과 사귄 것도, 유부남의 아이를 가진 것도 알릴 수가 없었다. 처음엔 입양을 보내려 했지만 그러려면 출생신고를 해야 했다. 가족관계등록부에 서씨와 아이의 관계가 등재되면 아버지는 언제든 서씨의 출산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공포스러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이를 다시 찾으러 오겠습니다." 서씨가 남긴 말이었다.

미혼모 중에서도 미성년자는 부모에게 더욱 쉽게 버림받는다. 더욱 열악한 환경에 처하는 이유다. 2년 전 가출한 정현아(가명·17)양은 이른바 '조건만남'을 하다 아이를 가졌다.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임신 5개월이었다. 부모님께 출산 사실을 알렸지만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는 이야기뿐이었다. 미성년자도 부모 동의 없이 단독으로 출생신고를 할 수 있다. 그런 사실을 몰랐던 정양은 아이 입양을 포기하고 10월12일 아이를 베이비박스에 넣었다. 아이는 뇌저산소증으로 태어나 수술비만 260만원이 나왔다. 100만원은 어찌어찌 마련했지만 나머지는 낼 방도가 없었다. 병원에 반드시 갚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서야 퇴원할 수 있었다. 9월 말 출산한 정양은 수술비를 갚기 위해 몸조리도 못하고 백화점 아르바이트를 뛰어야 했다.

최근 '미혼모 지위 개선을 위한 현황발굴연구 포럼'에서 발표한 김혜영 숙명여대 정책산업대학원 교수의 연구를 보면, 미혼모 중 가족이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있는 경우는 59%에 불과했다. 사실을 알린다 해도 부모들은 중절을 권유하거나(38%), 알아서 해결하라(9%)는 반응이 많았다. 김혜영 교수는 발표문에서 "부모의 냉담한 반응은 자녀 출산 후 자신과 자녀문제로 극심한 정서적 불안감에 처한 미혼모들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지역사회 내 지원망 구축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아이 아빠에게도, 부모에게도 버림받은 채 아이를 기르는 것은 쉽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일을 하려 해도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최지혜(가명·20)씨가 베이비박스를 찾은 이유다. 최씨는 이혼소송 중 둘째 아이를 낳았다.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였다. 그는 아이를 책임지지 않겠다고 했다. 출생신고는, 남편의 아이로 등록될 수밖에 없어 엄두를 못 냈다. 출생신고도 안 한 아이를 맡아 줄 보육기관은 없었다. 어린이집은 아이와 부모와의 관계가 명시된 주민등록등본과 영유아건강검진표가 있어야 다닐 수 있다. 두살배기 첫째 아이는 친정엄마가 돌봐줬지만 새로 태어난 아이는 맡아줄 수 없다고 했다. 한달간 직장에 아이를 데리고 다녔지만, 파견근무를 하는 처지에 지속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지난 10월 말, 두달도 안 된 아이는 베이비박스에 놓여졌다.

정영란 주사랑교회 전도사는 "아이를 데려온 미혼모들은 첫번째로 출생신고가 꺼려져 아이를 데려왔다고 하고 그다음으로는 경제적 문제가 힘들다고 한다. 우유를 잔뜩 주고 출근해 하루 종일 아이를 굶기다가 퇴근해서야 다시 우유 주는 일을 한달간 반복하다 펑펑 울며 베이비박스를 찾아온 미혼모도 있었다. 미혼모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수급자로 지정해 한달에 70만~80만원 정도는 지원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박영미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표는 "정부의 미혼모 지원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직장에서도 미혼모에게는 암묵적으로 퇴사를 요구한다. 이런 상황에서 생계를 홀로 꾸려나가야 하는 미혼모가 양육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김효진 박수지 기자 jul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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