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기의 예술과 사회]'서태지와 아이들'과 한국적 개인주의

2013. 11. 27.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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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공부하는 사회학이란 말 그대로 '사회'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사회학은 물론 정치학·경제학 등의 기초사회과학이나 법학·경영학·행정학·복지학·신문방송학 등의 응용사회과학 모두 근대 및 현대사회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오래 전 사회학을 처음 배우게 됐을 때 가졌던 의문 중 하나는 사회(社會)란 무엇인가였다. 한자의 의미로 보면 사회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뜻한다.

'사회'에 대응하는 영어는 당연히 'society'다. 이 society를 '사회'로 번역한 이는 일본 학자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society를 '사회'로 번역하는 데 일본 학자들이 적잖이 곤혹스러워했다는 점이다. society에는 자율적 개인들이 맺은 계약의 의미가 담겨 있는 데 비해, 메이지 시대의 일본에서는 개인이 독립된 주체가 아니라 가족 내지 국가의 구성원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사회'에 담긴 이런 개인과 계약의 의미는 서양 근대의 역사에서 개인주의가 갖는 중요성을 보여준다. 개인주의란 개인의 자율성과 책임을 중시하는 사상이다. 서양 근대사회의 성립은 이러한 개인주의의 발전과 함께 이뤄졌다. 개인주의는 자유주의의 등장을 자극했고, 이는 다시 서구 근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성장을 가져왔다.

신세대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젊은 세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92년 6월 데뷔 당시 경향신문은 이렇게 이들을 소개했다. "10대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는 '서태지와 아이들'. 서태지(서 있는 이)가 리더, 양현석(오른쪽), 이주노(아래)가 아이들 역." | 경향자료 사진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이 개인주의는 언제 본격화된 걸까? 어떤 사상이든 그것이 한 사회에 이식되고 토착화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그 과정은 비약적이라기보다 점진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점진적 과정에서도 그것이 확산되고 심화되는 여러 계기가 나타나는데, 우리 사회 개인주의의 경우 나는 1990년대 초·중반 신세대의 등장이 매우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1990년대 초반 우리 사회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신세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 갑자기 신세대 담론이 부상한 데에는 1987년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후 진행된 대내적 민주화와 대외적 탈냉전이 그 구조적 배경을 이뤘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적 배경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은 주체적 요인이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대학에 입학한 세대는 1980년대 중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시기에 청소년 시절을 보낸 만큼 소비와 욕망에 익숙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민주화가 가져온 정치적 개방 속에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문화에 역시 익숙해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바로 이들의 우상이었다. 정신보다는 신체, 이성보다는 감성을 중시하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는 신세대에게 커다란 호소력을 가졌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1992년 데뷔곡이자 대표작인 < 난 알아요 > 의 한 구절이다. 랩과 감각적 가사, 경쾌한 멜로디와 리듬을 앞세운 이들은 단숨에 소녀들과 젊은이들의 우상이 됐다. 1960년대 이후 우리 대중음악사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에 필적할, 또 그만큼 대중적 관심을 모은 가수는 조용필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데뷔와 함께 이들은 곧 전설이 됐고,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젊은 세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로 상징되는 신세대의 '망탈리테'(mentalites)다. 프랑스 역사학자 그룹인 아날학파가 주조해낸 망탈리테란 특정한 시대의 개인들이 공유하는 집단적 사고방식 및 생활방식, 간단히 말해 집단적 무의식 또는 심성을 뜻한다.

이론적으로 망탈리테는 수백년에 걸친 장기 지속의 역사에 대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사회 변동이 급격한 곳에서는 짧은 시간대에 이뤄지는 망탈리테의 변화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응답하라 1994'의 주인공들은 신세대들이다. 우리 사회의 주역이 486세대에서 신세대로 바뀌어가는 현재, 신세대가 소환하는 1990년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는 사회학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다. 사진은 tvN 방영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현장사진. | tvN제공

세대적 접근에서 보면, 우리 사회에서는 5060 산업화세대의 망탈리테, 40대 민주화세대의 망탈리테, 30대 신세대의 망탈리테 등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5060세대가 보기에 3040세대는 같은 민주화 세대로 분류될 수 있겠지만, 이른바 486세대의 망탈리테와 신세대의 망탈리테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주목할 것은, 486세대와 비교해 이 신세대는 잊힌 세대라는 점이다.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볼 수 있듯이 신세대의 등장은 파격적이었지만,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해 이내 사라져갔다. 하지만 주체적 관점에서 보면, 1990년대 초·중반 신세대가 구성한 집합적 정체성이 마음 속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들 정체성의 핵심을 이룬 것은 민주화라는 가치에 공감하지만 그 엄숙하고 권위적 방식은 거부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정체성의 저류를 이룬 게 다름 아닌 개인주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 세대가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개인의 자율성을 양도할 수 없는 핵심 가치로 받아들이고, 이성을 넘어서 욕망을 가진 존재로 스스로를 자각하는 것은 보수와 진보의 구분 못지않은 중요성을 갖고 있다.

물론 현재적 관점에서 볼 때 신세대 문화에 내재된 개인주의에는 명암이 존재한다. 한편에서 그것은 1980년대 '큰 이야기'의 운동정치에 맞서서 '작은 이야기들'의 삶의 정치를 보여줬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주로 감성과 욕망의 소비에 머물러 있었다. 한국적 맥락에서 개인의 등장을 알린 이 신세대의 개인주의에는 시민적 개인주의와 이기적 개인주의가 뒤엉켜 공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우리 사회에선 '응답하라 1994' 열풍이 불고 있다. '응답하라 1994'의 주인공들은 바로 이 신세대들이다. 이들의 목소리는 1997년 외환위기에 의해 곧 잊혀졌다. 하지만 모든 세대는 자기 시대의 주인공인 법이다. 이제 우리 사회의 주역이 486세대에서 신세대로 바뀌어가는 현재, 신세대가 소환하는 1990년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는 사회학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다.

이 시대에 등장한 한국적 개인주의가 이후 어떻게 변하고 발전해 왔는지에 대한 응답은 시민적 개인주의와 이기적 개인주의가 극단적으로 공존하는 우리 사회의 현재를 이해하는 데 의미 있는 한 통로를 제공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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