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어떤 세상은 TV를 꺼야 보인다

2013. 11. 26.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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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25일 비. 풋사과. #유재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1987년)

[동아일보]

올해 대상은 여대생인 민주의 '서울 여자'에 돌아갔다. '부산 여자 블루스' 같은 노래다. 유재하 동문회 제공

어제, 태어나서 처음 119에 전화를 걸었다. 죽을 뻔해서다.

오랜만에 좀 잘 살아보자고 비타민 알약을 먹는 과정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커다란 두 알이 서로 짜고 어깨동무 상태로 내 식도를 통과했나. 숨이 턱 막혔다. 이따금 명치쯤이 찌릿찌릿 너무 아파 나도 몰래 '억' 소리를 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식도가 긁혔을 거다. 30분 넘게 아프면 병원에 가라"고 조언했다. 40분간 아팠다. 배꼽 인사하듯 허리를 90도로 굽히고 고개는 든 채 물을 삼키라는 누리꾼의 충고가 의외로 도움이 됐다. 살았다.

어제 시작된 두 번째 삶 비슷한 것에서 처음 본 콘서트는 공교롭게 고인을 기리는 행사였다. 한양대 백남음악관에서 열린 제24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본선. 50 대 1의 경쟁을 뚫은 10팀의 무대가 소박해서 놀랐다. 미리 만든 음향을 재생해주는 흔한 전자장비 하나 안 올라왔다. TV 오디션 스타에 비하면 너무 심심한 참가자들의 가창을 받치는 건 그들이 직접 한 음 한 음 뜯고 두드려 소리 내는 피아노와 기타 연주였고, 무대 위 동선은 덜 짜여 있어 자꾸 엉켰다.

역대 수상자 모임인 '유재하 동문'들의 행사 진행도 어수룩하기는 비슷했다. 물론 실시간 중계나 문자투표도 없었다. 열 번째 무대가 끝나자마자 객석에 투표함이 분주하게 돌았다. 동문들의 쪽지 투표를 받아 올해 신설된 특별상인 '유재하 동문상' 수상자를 빨리 뽑아 발표하기 위한 거였다. 단조로운 무대 조명은 촌스러웠는데 100명 가까운 동문이 무대에 올라 이어달리기처럼 부른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은 장관이었다.

뒤풀이로 열린 '유재하 총동문회'에서 참가자들의 두 번째 무대가 시작됐다. 맥주 두어 잔에 얼굴이 빨개졌는데도 그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손은 변함없이 떨렸다. 보톡스를 주입받거나 제작진의 지시를 숙지하는 대신 똑같은 손가락 움직임을 300번쯤 연습했을 텐데도. 작곡가 H는 "위대한 음악인도 '방구석 뮤지션'에서 '동네 뮤지션'으로, '동네 뮤지션'에서 '지역 뮤지션'으로 크는 과정을 거친다. 참가자들도 지금 그런 단계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요즘에도 그게 보편일까.

솔직히 이번 대회 참가자들 노래 중에 고막을 긁을 만큼 신선한 게 없어서 아쉬웠다. 동네 뮤지션도 되지 못한 자의 되지도 않는 평가다. 근데도 난 어제 조용히 숨쉬는 노래, 살아있는 음악을 본 것 같다. 어떤 세상은 TV를 꺼야 보인다. 휴, 살았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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