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일의 맥] 선수 때리고 축협 무시하는 부끄러운 스승들

2013. 11. 6.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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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선수 이전 여성으로서의 인권이 철저하게 짓밟힌 폭력 사건이 WK리그에서 자행됐다. 구타보다 심한 언어폭력이었다. 선수들을 가르치는 스승들이 가해자라는 게 더욱 충격적이다.

WK리그 6개 구단 감독들이 서울시청 소속의 박은선 죽이기에 나섰다. 연합뉴스는 5일 여자축구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서울시청을 제외한 WK리그 6개 구단 감독들이 박은선의 성별 논란을 제기하면서 내년에 박은선이 리그에 뛸 수 없도록 조치를 요구했다. 만약 박은선이 계속 경기에 뛰면 내년 리그를 보이콧하겠다는 뜻을 알렸다"고 밝혔다.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아무리 감독들의 비공개 간담회에서 나온 비공식적인 발언이었다지만, 도가 지나쳤다.

충격적인 소식에 축구팬들은 할 말이 없다는 반응이다. "축구계에서 퇴출되어야할 사람들은 박은선이 아니라 그녀를 몰아내기 위해 작당하고 나선 감독들"이라는 한 네티즌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팬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아예 박은선이라는 선수의 생명을 끊고자 작정한 사건이다. WK리그는 총 7개 팀으로 운영된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6개 팀의 감독이었다. 서울시청 서정호 감독만 빠진, 아니 서정호 감독만 뺀 비공식 모임이었다. 이 자리에서 6개 팀 감독들은 박은선의 체구가 워낙 커 다른 선수들의 부상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박은선을 추방시키자고 결의했다. 그러면서 박은선의 성 정체성에 의혹을 제기했다. 넘지 말아야할 선까지 넘어버렸다.

WK리그에서는 그야말로 군계일학인 박은선이 다른 팀 감독에게는 눈엣가시인 게 분명하다. 박은선은 올 시즌 19골로 리그 최다득점을 기록하면서 완벽한 부활을 알렸다. 툭하면 소속팀을 이탈해 '풍운아'로 통했던 박은선은 스승 서정호 감독의 끝없는 관심과 애정 그리고 기다림 속에서 지난해 다시 서울시청으로 돌아왔고, 올 시즌 펄펄 날았다. 그리고 박은선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 서울시청은 올 시즌 리그 준우승을 차지했다.

타이밍이 문제다. 구단 이기주의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 배경이다. 왜 날개를 펼치지 못하던 지난해에는 가만있다가 올해 입장이 달라졌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박은선이 성인무대에 뛰어든 것은 지난 2005년의 일이다. 9년 동안 지켜본 선수의 성정체성을 이제서야 의심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다른 선수들의 부상을 걱정하는 지도자들의 마음 씀씀이가 한 선수의 생명을 마감시키는 것에는 어떻게 이리 단호할 수 있는지 모를 일이다.

대한축구협회의 '대표선수 A매치기록'을 보면 박은선은 19경기 11골이라는 뚜렷한 발자취가 남아 있다. 2003년 미국에서 열린 FIFA 여자월드컵을 비롯해 2004년 아테네 올림픽, 2005년 동아시아대회 등 굵직한 국제대회에 대한민국을 대표한 선수로 출전했다. 결국 WK리그 6개 팀 감독들은 대한축구협회도 무시한 셈이다. 대한축구협회가 엄연한 여자선수로 인정했고, 중요한 대회에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로 발탁한 이를 향해 '여자가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는 꼴이다.

감독들의 발의는 단장들 모임에서 재결의 될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여론의 동향이 파악됐다면 WK리그 구단들이 뜻을 바꿀 수도 있다. 사적인 자리에서의 사담이었다고 발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이 원하는 소기의 성과를 거뒀는지도 모른다.

멋진 축구실력과 달리 박은선은 여린 심성의 소유자다. 팀을 이탈하는 일이 빈번했던 것도 심리적 방황이 컸기 때문이다. 그랬던 박은선이 어둠의 터널에서 빠져나와 비로소 '여자 박주영'이라는 수식에 어울리는 활약상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이때 찬물이 끼얹어진 셈이다. 서울시청과 박은선이 어떻게 대응할지는 미지수이지만, 확실한 것은 이미 박은선이란 인격체는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수로서의 삶에도 큰 회의감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부끄러운 축구 지도자들의 모습에 한숨이 나온다. 자신들의 최상위 집단인 대한축구협회를 무시하고 자신들이 가르치는 선수에게는 폭력을 행사했다. 아무리 성적도 좋다지만 이것은 아니다. 감독은 선수들에게 선생님으로 불린다. 스승이다. 도대체 뭘 배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MK스포츠 축구팀장 lastuncle@maekyung.com]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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