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에 기본소득 명시’ 스위스 국민투표 관심 고조
스위스 연방의회가 전 국민에게 노동 여부에 관계없이 기본적인 소득을 보장하는 기본소득 제도를 헌법에 명시할지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기로 했다. 노동 의사나 직업의 유무, 소득 수준을 가리지 않고 최저생계에 필요한 소득을 보장하자는 생각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통념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몽상으로 치부될 법하지만 끊임없이 정책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 “국가가 최저생계 소득 보장” 스위스, 국민제안 의회 제출
젊은층·비정규직 지지 높아
미 알래스카는 배당형식 지급… 나미비아·캐나다선 시험실시

스위스 의회가 스위스 국민 12만명의 청원으로 기본소득을 헌법에 명기하는 헌법 개정을 국민투표에 부치기로 결정한 지난 4일 베른 스위스 연방의회 앞에서 시민단체 회원들이 스위스 인구 800만명을 상징하는 5라펜짜리 동전 800만개를 쏟아부은 뒤 삽으로 퍼뜨리고 있다. | 유튜브에 올라온 RT뉴스 화면 캡처
■ 스위스에서 무슨 일이
스위스 기본소득네트워크(BIEN)는 지난 4일 기본소득 보장을 헌법에 명시하자는 국민제안을 스위스 국민 13만명의 서명을 받아 연방의회에 제출했다. 스위스는 일정 기간 안에 10만명 이상이 국민제안을 하면 이를 반드시 국민투표에 부쳐야 한다. 이번 국민제안에는 국가의 기본소득 보장 의무, 기본소득이 모든 시민이 건전하고 위엄있는 삶을 영위하는 데 기초가 된다는 취지, 기본소득의 수준과 재정 문제는 별도의 법으로 정한다는 원칙 등 크게 세 가지를 담았다. 2년 이내에 실시하도록 돼 있는 국민투표에서 이 제안이 통과되면 기본소득이 헌법에 반영된다.
기본소득네트워크는 국민제안에 별도로 첨부한 문서에 기본소득을 기존 사회보장 제도에 통합해 운용하되, 18세 이상 성인은 월 2500스위스프랑(약 300만원), 청소년 및 노인은 약 4분의 1 수준의 기본소득 보장을 제안했다. 스위스의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은 7만8881달러(약 8400만원)다. 이 제안에 반대하는 재계 등은 부가가치세 등 세금 인상이 불가피하고, 기업과 국가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논리를 펴는 반면 기본소득네트워크는 기존 제도를 효율적으로 개편하고, 약간의 추가 재원을 발굴하는 것으로도 시도해볼 만한 제도라고 주장한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노동기구(ILO)의 이상헌 선임연구원은 지난 6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스위스의 경제단체가 10여페이지에 달하는 반박문을 내고 로비를 했으나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며 국민투표 부의에 놀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이 제안이 일러야 2015년 초반 있을 투표를 통과할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애초 10만명 이상 서명을 받아 전 국민이 이 문제를 두고 투표하게 될 것라고 예상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결과를 속단하기 어렵다고 했다. 특히 스위스의 평균소득 이하를 받고 있는 젊은층,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기본소득이 지지를 얻고 있다고 한다. 전국적 단위에서 기본소득 제도를 실시하려 한 시도는 미국, 브라질 등에서 있었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스위스 사례는 현실성을 띤 최근 사례라는 점에서 기본소득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보인다.
■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일을 안 할 것이라는 우려
다니엘 하니와 에노 슈미트가 2008년에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문화적 충동으로서의 기본소득>을 보면 행인들에게 기본소득을 설명해주자 “좋은 아이디어”라면서도 “그런데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을 것 같다”고 답한다. 제작자가 “당신이라면 어떡하겠느냐”고 묻자 “나는 일을 계속하겠다”는 응답률이 80%를 넘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불신인 셈이다.
에블린 포겟 캐나다 마니토바대 의대 교수는 기본소득 보장이 노동 의욕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점을 경험적으로 보여줬다. 그는 1974~1979년 마니토바주 위니펙과 도핀에서 기본소득 보장 제도가 실시된 사례를 연구한 최근 논문에서 “기본소득이 실시된 뒤 일을 그만두거나 노동시간을 줄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면서 “이것은 잘 고안된 기본소득 제도는 오히려 사람들의 노동 의욕을 고취하고, 노동빈곤층에게는 다른 사회적 지원보다 소득을 보완해주는 것이 효과가 더 좋다는 걸 보여준다”고 밝혔다. 전 지역이 아니라 샘플을 추출해 실시된 마니토바주의 기본소득 실험은 당시 돈으로 4인가구에 3300달러(현재가치 1만6500달러)를 지급했다. 포겟 교수는 기본소득을 받은 사람들은 무리한 노동을 할 필요가 없고 정신병에 잘 걸리지 않아서 병원신세를 진 비율이 8.5% 떨어졌다고 보고했다.
1983년 <기본소득: 경제적 안정성에 대한 권리>를 쓴 앨런 시헨 미국 기본소득네트워크 연구위원은 산업구조의 변화로 양질의 일자리가 더 이상 창출되지 않는 현실에 주목해 기본소득론을 설파한다. 그는 지난 8월 허핑턴포스트 기고에서 “전 지구적 자본은 값싼 노동력이 있는 곳으로 일자리를 계속 옮기고, 기술 발전으로 수많은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다”며 “일자리와 경제성장에 더 이상 기댈 수 없다. ‘노동-복지’가 실업, 빈곤, 주택난을 해소해주리라는 신화에서 이제 벗어날 때”라고 했다. 그는 노동하지 않고도 억만금을 버는 부자들이 많은 현실은 소득과 노동의 인과관계가 필연적이지 않음을 말해준다고 본다.

■ 재원 마련은 어떻게
기본소득 재원 마련이 어렵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미국 알래스카주가 1982년부터 실시해오고 있는 기본소득 제도인 ‘영구기금배당’이다. 알래스카주는 알래스카에 거주하는 미국인으로 서류만 작성하면 누구에게나 주는 이 배당금을 석유에 대한 세금으로 조성한 ‘알래스카영구기금’의 투자 수익금에서 충당하고 있다. 기금의 투자 수익률과 연동해 많을 때는 5인가구 기준으로 연 1만6000달러를, 적을 때는 연 4000달러 정도를 무조건 지급해왔다. 크지 않은 돈이지만 이 제도 덕분에 알래스카는 미국 50개 주 가운데 가장 평등한 주의 하나로 꼽힌다. 이 제도는 알래스카 주민들 사이에 워낙 인기가 좋아 어떤 정치인들도 건드리지 못한다고 한다. 지난봄 알래스카 주의회는 석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석유기업에 대한 세금 인하법안을 통과시켰지만 기업들은 생산량을 늘리지 않고 있다.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배당이 줄어들 것을 우려한 주민들은 이 법안 철회를 요구하는 청원에 5만명 이상이 서명했고, 내년 8월 주민투표가 실시될 예정이다.
칼 위더키스트 조지타운대 카타르 외교학교 교수는 “알래스카주가 석유세입금을 기본소득 재원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석유가 발견되기 전에 헌법에 담은 무주지와 자연자원에 대한 공동소유권 원칙 때문”이라며 “석유자원은 기업의 것이 아니라 주민 공동의 재산이기 때문에 가능한 발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자연자원이 없는 곳은 재원을 어디서 마련해야 하는가. 위더키스트 교수는 “홍콩과 싱가포르처럼 국토가 좁고 자연자원이 거의 없는 나라는 매우 가치가 높은 부동산이라는 자원이 존재하지 않느냐”며 “싱가포르에서 부동산세로 만든 재원은 알래스카의 석유로 만든 기금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