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화사업'을 아시나요?

입력 2013. 9. 14. 14:20 수정 2013. 9. 14.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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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박래군의 인권이야기] 학생운동권 강제징집해 프락치로 활용한 전두환 정권의 녹화사업

의문사와 고문으로 피해 입은 이들에게 한마디 사과도 없는 국가

한 달쯤 전에 대학 동기인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저음의 목소리로 재심을 청구하고 싶다고, 변호사를 소개해달라고 했다. 그가 사건을 설명하고서야 대학 1학년 시절에 강제징집을 당했고, 강제징집 당한 군대에서 보안사에 끌려갔던 일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운명의 1981년 11월의 시위

1981년 11월25일, 학교 석조건물의 지붕까지 타고 올라간 담쟁이의 붉은 단풍잎들도 떨어지던 그 가을날은 오후 수업을 들어가기 전까지 낮술이라도 마시기 딱 좋은 한가로운 오후였다. 하지만 그날은 대학 1학년생이던 내게도 전화를 건 친구에게도 운명의 날이었다. 나는 하루 종일 교정 곳곳에서 진행된 학내 시위를 지켜보는 구경꾼이었지만 그날의 시위를 계기로 운동권이 됐다. 친구는 격렬했던 그 시위에 참가했다가 강제징집됐다. 군에 끌려간 지 7개월 정도 지난 1982년 6월, 그는 보안사에 끌려갔고 모진 고문 끝에 국가보안법 위반 범죄자가 됐다. 그리고 그날 그와 함께 강제징집됐던 친구 정성희는 결국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늦가을의 그날 오후 수업을 받는 강의실까지 최루탄 냄새가 스며들어 수업을 더는 진행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날 시위는 격렬한 투석전이었다. 학생회관 4층에서 2학년 여학우가 시위를 주동하는 중이었는데 잡으러 올라온 경찰을 피하다 곧바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학생회관 앞에 몰려 있던 학생들이 여학우를 병원으로 후송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거기에다 경찰은 최루탄을 퍼붓고 학생들을 속속 연행했다. 4층에서 떨어진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서 연행부터 해대는 경찰의 행태는 시위대를 분노케 했다. 핏발 선 눈으로 극도의 흥분 상태가 돼 있던 학생들은 교정 곳곳에서 돌을 깨고 날랐고, 투석전을 전개했다. 하지만 나는 저녁 무렵까지 이어진 시위에 갈등만 하다가 합류하지 못했다.

그날의 학내 시위에서 연행된 학생들은 무더기로 강제징집됐고, 그들 중에 전화를 걸어온 그 친구가 있었다. 철책 경계근무를 마치고 페바부대(전투지역전단)에 내려와 야전훈련을 뛰던 중 휴가 나가는 고참 분대장에게 운동 동료와 선배에게 각 1통씩의 편지를 부탁했다. 그 분대장은 그에게 잘해주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믿었기에 검열에 걸리지 않는 사신을 보낼 수 있었다. 그 얼마 뒤 부모님이 면회 오기로 한 토요일 오전에 중대장이 그를 불렀다. 중대장은 소지품을 챙기라고 지시했다.

그길로 지프차에 태워져 눈이 가려진 채 서울의 보안사 후암동 분실(남영동 분실로도 말해진다)로 끌려갔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일방적인 구타를 당해야 했다. 그들은 막무가내로 부대에서 단파 라디오로 북한 방송을 청취했다고 자백할 것을 강요했단다. 맷집이 좋은 그는 고문에도 불구하고 그 요구만은 거부했다. 모진 과정을 거친 끝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군법회의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 군 생활을 마쳤다.

벌써 30년이 된 이야기를 그는 풀어냈다. 변호사 앞에서 육군본부로부터 받은 판결문을 하나 놓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지만 판결문에는 그가 당했던 모진 고문 얘기는 없었다. 다행히 수사기록이 남아 있다면 모를까 재심의 문턱을 통과하기는 쉽지 않았다.

녹화사업 끌려가 프락치되는 공포

강제징집은 그 친구의 얘기만이 아니라 내 얘기이기도 했다. 1983년 4월28일, 학내 시위로 경찰서 조사를 받다가 강제징집된 날이었다. 강원도 양구의 21사단 훈련소를 거쳐 금강산의 마지막 봉우리라는 가칠봉 인근의 일반전초(GOP) 철책근무에 배치됐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보고되고 있었다. 소대장은 아예 보안사에 보고를 올려야 함을 말하면서 동향을 파악했지만, 내무반의 누가 보안사의 끄나풀인지는 몰랐다. 편지는 늘 가위질로 개봉됐고, 편지의 주요 대목은 보란 듯이 빨간 사인펜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같은 소대에 강제징집된 특수학적변동자가 무려 4명이나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학생운동과 거리가 먼 경우였다. 그를 제외한 우리는 언제 녹화사업에 끌려가 프락치를 강요당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갖고 살아야 했다.

사단·연대 보안대에 불려가 '나의 20년'이라는 자서전을 수없이 썼다. 강제징집자들은 너무도 일찍이 자서전을 썼던 셈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의 성장 과정을 A4용지에 빽빽이 적어내야 했다. 그들의 목적은 어차피 얼마나 의식화돼 있는지, 학생운동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파악하는 것에 있었으므로 대강 책 몇 권 외에는 읽지 않았으며, 아는 것도 대충 뭉개면서 모른다고 쓰게 마련이었다. 그러면 그중에서 의심나는 대목을 물어보고는 다시 쓰게 했다. 물론 그때마다 아주 심하지는 않았지만 폭력이 가해졌다. 다시 쓰고, 다시 또 쓰고…. 그리고 휴가 때면 보안대에 불려갔다. 휴가 나가면 무슨무슨 공사로 가라고 했다. 거기 가서 학생운동권 동향을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 짓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C급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대충 넘어갈 수 있었다.

사실 당시 우리에게 군대는 입대 전부터 공포였다. 먼저 강제징집된 동기생이던 정성희가 군에서 죽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1982년 7월이었다. 그가 강제징집됐다가 첫 휴가를 나온 게 6월이었고, 별 특이사항이 없었는데 귀대 뒤 한 달쯤 있다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와 일면식도 없고 그와 같이 학생운동을 한 적도 없었지만, 그와 함께했던 동료 녀석을 통해 그의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어느 때쯤부터 강제징집됐다가 휴가 나온 동료들이 프락치를 강요받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죽으면 죽었지 어떻게 운동하는 동료와 조직을 팔아넘길 수 있겠는가.

우리는 감옥에는 가더라도 군대는 가지 말자고 다짐했다. 개죽음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학생운동을 하는 우리에게 있었던 것인데, 나 역시 그 공포의 길로 딸려간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군 생활 내내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살아야 했다. 다행히 녹화사업에 끌려가지는 않았다. 1984년 강제징집으로 죽은 대학생 6명을 위한 추모제도 있었고, 국회에서 강제징집과 함께 녹화사업의 부당성을 폭로하는 일이 있고 나서 녹화사업이 멈춘 탓이었다.

총 맞은 주검으로 돌아온 학생들

1970년대 녹화사업은 벌거숭이 민둥산에 나무를 심어 푸르게 만드는 사업이었다. 그럼 우리가 떨어야 했던 녹화사업이 군에서 산에 나무를 심는 사업이었을까? 공식적으로는 1982년부터 1984년까지 군에서 진행된 녹화사업은 무엇이었을까? 붉은 이념으로 물든 의식을 푸르게 한다는 의미로 녹화사업이라고 이름지어졌다. 전두환의 지시에 의해 보안사에서 강제징집된 학생운동권 출신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강제 의식 전환 사업이었고, 이들을 '활용'해 학생운동권 동향을 파악한다, 이런 활용을 통해 지하의 운동권 조직을 찾아내 운동권 인맥을 파악하고, 학생들의 시위 계획까지 파악하려 했다.

물론 이 일이 순조롭게 될 리 없었다. 그러므로 밀실 고문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녹화사업이 진행된 곳은 경기도 과천과 서울 퇴계로 진양상가의 분실이었다. 그곳에 끌려갔던 한 선배는 토로했다. "가서 유서까지 썼어. 고문당하다가 죽으면 자살로 위장하려 했던 거지. 그리고 조직을 불라는 거야. 알아야 불지. 물고문에 된통 당했지." 그 밖에 보안사 분실이 몇 군데 더 있었고, 사단 보안대에서도 녹화사업이 진행됐다. 그 과정에서 강제징집된 대학생 6명이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정성희(연세대), 김두황(고려대), 한희철(서울대), 최온순(동국대), 이윤성(한양대), 한영현(성균관대), 내 또래의 20대 전반의 청년들이 가슴에 총 맞은 주검으로 돌아왔다.

잊고 있던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을 대면한 것은 유가족이 된 뒤였다. 1988년 10월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시작된 의문사 유가족들의 집단 농성에 6명의 유가족이 합류했다. 1982년부터 1984년 사이, 세상이 녹화사업을 모르던 그 시절에 양심을 팔기를 강요받아서 괴로웠던 그들의 죽음, 그들이 자살에 이르기까지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의 '심사와 활용 대상'이었다면 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2002년 나는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과장으로 녹화사업을 조사했다. 의문사 당한 6명을 비롯해 군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죽어간 이들의 진실을 밝히는 일을 8개월가량 맡았다. 그 뒤 2005년 국방부에 설치된 과거사위원회가 또 한 차례 녹화사업 전반을 조사했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당시 독재자 전두환의 지시로 보안사령부의 최경조 대령이 입안하고, 구체적인 실행은 서의남 중령이 맡았다. 그때 보안사령관은 신군부의 박준병이었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군에 강제징집되면 특수학적변동자로 분류됐다. 그들은 무조건 철책 근무에 배치됐다. 군에 갈 수 없는 신체적 조건이나 병력을 가진 이들, 독자도 예외가 없었다. 당시 강제징집자는 1152명이었다. 이들 중에 921명이 녹화사업을 강요받았다. 녹화사업은 비단 강제징집자만이 대상이 아니었다. 정상적으로 입대한 이들도 대상이었고, 민간인도 포함돼 있었다. 그래서 총 1192명이 녹화사업에 시달려야 했다. 그중 일부는 협조자(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았고, 여학생도 활용했다. 너무 괴로웠던 이들 중에 몇몇은 자살로 더 이상의 '활용'을 거부했다.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한 걸음

강제징집되고 녹화사업을 당한 이들에게 이 국가는 어떤 사과도 보상도 하지 않았다. 진실화해위원회도 6명의 죽음에 대해 더 이상 조사하지 않았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친구는 재심을 통해 무죄도 확인하고 국가의 사과도 받기를 바란다. 그렇게 과거의 국가 범죄를 하나하나 확인하는 일은 분명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한 걸음이 되리라 믿는다. 기운 내라, 친구.

박래군 인권중심 사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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