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이주일의 小史] <99> 짧았던 프라하의 봄

2013. 8. 19.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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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지 않아도 알고, 알고 있어도 항상 낯선, 설렘과 기대로 다가오는 곳 프라하.

우리에겐 전도연과 김주혁이 열연한 TV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을 통해 더욱 친숙한 도시가 됐고, 1989년 개봉한 영화 '프라하의 봄'은 여주인공 줄리엣 비노쉬와 의사 역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리며 68년 체코 자유화 현장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사회주의 치하에서 지식인이 겪어야 했던 무력감과 좌절을 다룬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원작이다.

프라하의 봄은 드라마 배경처럼 그리 아름답고 낭만적이지 않았다.

1968년 8월 20일 오전 11시, 구 소련을 비롯한 동독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등 5개국으로 구성된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사전 통고 없이 일제히 체코슬로바키아를 무력 침공했다. 우호국이라 주장했던 이들의 침략 준비는 면밀했고 침략군의 대부분은 소련 군대가 차지했다. 8월 21일 오전 4시, 프라하 시내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 건물이 소련 낙하산 부대에 의해 점령당했고 시민들은 바츨라프 광장을 진격해 들어오는 소련군 탱크 앞에서 "나를 쏴라!"며 외쳐댔다.

민중들은 비폭력으로 저항했다. 마을 표지판을 바꿔 침략군의 혼란을 유도했고 소련군에 맞서 돌을 던지고 전차 연료탱크에 구멍을 뚫어 불을 붙여 싸우기도 했지만 상황은 역부족이었다. 전쟁을 우려한 세계와 주변국들이 침묵했기 때문이다. 결국 프라하를 비롯한 체코슬로바키아 전 국토가 소련군에 점령당했고 수 많은 국민의 희생과 지식인들의 망명이 뒤를 이었다.

동유럽의 파리라 불리며 아름다운 도시의 대명사였던 프라하가 소련의 침공을 받게 된 것은 냉전시대의 산물이었다. 1956년 소련 내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이 있은 후에도 체코슬로바키아 노보트니 정권은 스탈린을 추종하며 보수 정책을 이어갔다. 60년대 들어 이에 반발한 지식층을 중심으로 민주화와 자유화 실현을 위한 물결이 일어났고 마침내 68년 1월 개혁파의 두브체크가 당 제1서기에 오르며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했다. 검열제가 사실상 폐지되고 많은 정당과 정치단체가 부활됐으며 의회는 활발한 논의와 비판의 장으로 변모했다. 자유화를 향한 정책 변화를 온 국민들은 '프라하의 봄'이라 부르며 공산체제의 탈바꿈을 환영했다. 짧은 기간 찾아온 프라하의 봄이었다.

동유럽 국가에 미칠 체제 변화에 불안을 느낀 소련은 결국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대한 이탈'을 명분으로 침공을 강행해 두브체크를 밀어내고 후임 서기장에 강경파 후사크를 임명했다. 개혁의 수레바퀴가 멈춰선 것이다.

프라하에 다시 봄이 찾아오기까지는 21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89년 소련 공산당서기장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과 함께 공산정권이 퇴진한 후 벨벳혁명의 주인공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이 들어섰고 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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