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도로시의 길처럼 이어진 건반의 행렬

입력 2013. 8. 12. 03:05 수정 2013. 8. 12.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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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11일 일요일 맑음. 아이 리멤버 피아노 레슨스.
#70 Porcupine Tree 'Piano Lessons'(1999년)

[동아일보]

"선생님…, 무서워요…."

그날 밤, 2층 쪽에서 분명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집에서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곳, 바로 내부 계단 쪽 말이다. 계단참 벽에 걸린 '눈밭의 예수' 사진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지경이었으니까. "괜찮아. 아무 소리도 안 나잖아. 자, 다시 쳐 보자. 첫 번째 마디부터." 피아노 선생님이 다시 피아노 위에 놓인 악보를 볼펜으로 톡톡 쳤다.

피아노 선생님은 우리 집에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유일한 젊은 여성이었다. 아홉 살의 난 피아노 치는 게 싫었다. '어이, 체르니. 그리고 아농(Hanon)! 당신들이 위대한 작곡가가 못 된 이유, 알아? 너무 지겹기 때문이야!' 피아노는 그 검은 몸체로 무겁고 딱딱하게 날 짓눌렀다.

연습곡을 한 번 칠 때마다 악보 위에 바를 정(正) 자의 획이 하나씩 늘었지만 어쩐지 시원해지지는 않았다. 그날 내부 계단 쪽에서 오싹한 환청을 들은 건, 우리 집이 공포의 산장 같은 곳이 되면 피아노 선생님도 더는 날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나조차 속은 내 마음속 아련한 꼼수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주말을 경남 사천에서 보내면서 문득 피아노 레슨이 생각났다. 음표 하나하나에 초인적으로 집중하며 수업을 따라가는 학생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나도 학생이 된 듯 수업 내용까지 받아 적었다. 지난주 수요일에도 난 '강의'에 나갔다. 유명한 재즈 기타리스트 리 리트나워가 서울 삼성동에서 클리닉(연주자 특강)을 열었는데, 정식 내한 공연인 줄로 잘못 알고 갔던 거다. 착오 덕에 배움의 즐거움을 오랜만에 느꼈다.

1987년 결성된 영국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포큐파인 트리의 '피아노 레슨스'를 처음 들었을 때도 그랬다. 피아노 앞에 앉은 꼬마의 먹먹한 기분으로 돌아간 것. 보컬 스티븐 윌슨이 노래한다. '피아노 레슨이 기억나. …너만의 목표는 잊어버려. (상업적으로) 팔릴 준비를 하라고. …내 마지막 남은 어리석은 꿈은/너와 함께 하는 것. …넌 가로등 아래서/꿈이 사라지길 기다리지.'

손끝에 닿던 차갑고 검고 흰 건반들. 악보 위에 늘어선 정(正)의 행렬. 피아노 레슨은 계속된다. 검은 건반, 흰 건반, 검은 건반, 흰 건반…. 흐르는 시간 위로 도로시의 길처럼 이어진다.―사천에서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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