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내가 당신을 원하는 만큼 나를 원해주길 원해
#67 김창기 '원해'(2013년)
[동아일보]
'날 둘러싼 이 벽을 무너뜨리고/당신이 들어와 주길/내 전원을 다시 켜주길….' ―김창기 '원해' 푸른곰팡이 제공 |
어제 오후, 4년 4개월 만에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에 갔다. 김창기의 2집 발매 콘서트를 보기 위해서였다. 김창기는 고 김광석(1964∼1996)도 속했던 그룹 동물원 출신. 2000년 솔로 1집을 낸 뒤 최근 13년 만에 2집 '내 머리 속의 가시'를 냈다.
선한 인상의 그는 여전히 노래를 잘 못했다. 음정은 불안하고 기교는 없었다. 근데 정말 열심히 불렀다. 소아정신과 의사인 그는 스스로가 환자인 듯, 사이코모노드라마 무대에라도 선 듯 두 손을 가슴 위에 포개고 눈을 찡그리며 토로하듯 노래했다.
'어떤 이들은 극복해/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아/난 아마 후자 쪽에 속하는 것 같아'('난 그냥 이대로 있겠어!') '냉장고의 뭔가 썩지 않은 걸/억지로 입에 털어 넣으면/난 살아있어'('난 살아있어') 'SUV와 주말이 있어/SNS와 친구도 있어/결국 내가 이것뿐인가 하는 의혹에 잠길 때도 있어'('난 아직도 외로워')….
'슈퍼스타K'에 나갔다면 그는 아마 탈락했을 거다. '악마의 편집'에 의해 아주 웃기는 도전자로 포장돼 3초 정도 화면에 걸렸을지 모른다.
깜짝 등장한 동물원의 현 멤버들(배영길, 박기영, 유준열)과 '거리에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널 사랑하겠어' '변해가네'까지 부른 김창기가 말했다. "저기 밖에 혼자 술 먹고 있는 바보 하나(학전 앞마당의 김광석 노래비) 있죠? 그 새끼를 위한 노랩니다. 그 병신 같은 새끼 땜에 제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요. 그 새끼가 불러야 되는데…."
2집 타이틀 곡 '광석이에게'가 시작됐다. '네가 날 필요로 했을 때 난 나만의 이유로 거기에 없었고'라고 노래하는 김창기의 눈은 붉게 젖어들었다. 노래는 끝났고 조명은 꺼졌다. 객석의 끊이지 않는 박수에 김창기는 눈 닦고 코 풀며 나와 통기타 한 대 둘러멨다. "안 울려고 하는데…. 늙어서 그래요. 남성호르몬이 부족해서…." 그는 자신이 만들고 김광석이 부른 노래 '잊혀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들려줬다.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김창기가 지은 곡을 좀더 훌륭한 보컬리스트가 부른다면 더 좋은 곡이 될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 이 느낌은 절대로 안 날 거야. 난 노래를 원해. 자랑하지 않는 노래, 날 꽉 채워 조르지 않는 노래, 음원 차트를 '올킬'하는 대신 누구도 죽이지 않는 노래. 그리고 '내가 당신을 원하는 만큼 나를 원해주길 원해'.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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