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네 에너지의 8분의1만 기타에 쏟아봐"

입력 2013. 6. 11. 03:20 수정 2013. 6. 11.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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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10일 월요일 맑음. 비포 더 돈. #61 Quadron 'Day'(2010년)

[동아일보]

재즈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 음악만 들으면 손가락이 12개쯤 있는 듯하다.

"만날 욕하고 징징대는 데 쓰는 에너지 중에 8분의 1만 음악에 쏟아 봐! 훌륭한 기타리스트가 될걸!"

오뉴월 밭고랑 같은 이마 주름을 실룩대며 제시(이선 호크)가 욕을 퍼붓는 상대는 그 밭 위 언덕처럼 불룩하게 배 나온 중년의 셀린(쥘리 델피). 순정만화 주인공 같던 호크와 델피가 벌써 40대라니. 풋풋한 첫사랑, 아련한 옛사랑의 미래형이 고작 사실혼 관계의 견원지간이라고? 어젯밤 영화 '비포 미드나잇'을 보며 맥이 탁 풀렸다.

김수현 드라마식 부부싸움을 벌이다 튀어나온 제시의 말 중 "훌륭한 기타리스트가 될걸!"의 원어 대사는 "빌어먹을 장고 라인하르트라도 될 걸!"이다. 전편 '비포 선셋'에서 노래도 했던 델피는 실제로 2003년 싱어송라이터로 데뷔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8분의 1'의 은유는 의도된 걸까. 기타 연주에 주로 쓰이는 손가락은 왼손 엄지와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제외한 8개. 벨기에 출신 재즈 기타리스트 라인하르트(1910∼1953)는 열여덟 살 때 화재 사고로 왼손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잃었다. 그는 음악을 포기하는 대신 왼손 검지와 중지를 활용해 초인적인 연주를 해냈고 전설이 됐다. 전편 '비포 선셋'의 배경이자 셀린의 고향인 파리를 대표하는 그의 달콤쌉싸래한 음악은 집시처럼 방랑하는 주인공들을 위한 좋은 사운드트랙이다.

시리즈의 1편인 '비포 선라이즈'를 야한 영화인 줄 알고 봤던 1995년이 떠오른다. 학교 친구 두 명과 의기투합해 찾은 작은 비디오방. "야, 야한 거 보자, 야한 거!" 송중기 같은 피부 안에 들짐승을 키우던 이율배반적 동기 J가 집어든 비디오에 쓰여 있던 제목, '비포 선라이즈'. "야, 심지어 (여주인공도) 예뻐!"

어두컴컴한 방 안에 반쯤 드러누운 시커먼 남자 셋의 두근거림은 영화 시작 30분 만에 멎었다. "야, 이거 야한 거 맞아? 상열지사는 없고 뭐 이렇게 대사가 많아?" 영화 말미, 음침한 공원에서 키스하던 제시와 셀린을 비추던 화면이 아침 해로 넘어가며 '중략'의 묘가 발휘된 순간엔 순결한 내 입에서도 험한 말이 나올 뻔했으니….

세월은 흘렀다. 페북(페이스북)과 스카이프(인터넷 전화)가 원격 연애까지 가능케 하는 시대가 왔다. 격세지감보다 슬픈 건 견원지간으로 변한 제시와 셀린. 약지와 새끼손가락 대신 머리숱과 마음을 잃은 둘의 싸움이 실은 어떤 노래인 듯했다. 환청이었지만. 젊음은 저문다.

'낮이여/넌 날 밝게 해/따뜻하게 해… 넌 내 눈을 아프게 해.'(쿼드론 '데이' 중)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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