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를 정신 나간 여자로 몰지 말라

입력 2013. 5. 17. 19:20 수정 2013. 5. 17.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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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표창원의 죄와벌

<14> 의대생 집단성추행 사건

재력·지위 갖춘 가해자 가족은초호화 전관 변호인단 구성해사죄 대신 반격에 나섰지만오히려 그것이 화를 키우며출교와 엄중 처벌로 이어졌다피해자가 받았을 상처보다가해자 아들에 남을 오점이더 큰 걱정거리였던 어머니피해자를 인격장애로 몰다가명예훼손으로 이례적 법정구속

2011년 5월21일 사립 명문대인 고려대학교 의대 학생들이 경기도 가평 용추계곡으로 학과 동아리 단합대회를 떠났다. 이튿날, 한 여학생이 고려대 양성평등센터를 찾아 성폭행 피해 상담을 신청했다. 곧 경찰 수사가 진행되었다.

혐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졸업을 앞둔 마지막 단합대회에서 지난 6년 동안 고락을 같이한 동기들과 회포를 풀며 술을 많이 마신 뒤 잠을 자던 피해자에게 남학생 셋이 다가와 옷을 벗기고 신체 부위를 만지며 그 장면을 휴대전화로 찍은 것이다. 특히 여학생이 피해 사실을 알고 가해 남학생들에게 항의 문자를 보내자 "아, 네가 모를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알았냐? 이제 우리 큰일 났구나"라는 식의 진정성이 담기지 않은 답을 보내왔다.

배아무개씨만 끝까지 혐의 부인하다

경찰 조사가 시작되자 가해 남학생들은 피해자에게 미안하다며 연락해 사과하기 시작했고, 가해자 부모와 가족이 피해자를 찾아 합의 및 고소 취하를 요청했다. 오랫동안 여성계 등에서 폐지를 주장하던 '성범죄 친고죄' 조항 때문에 빚어진 가중된 고통이자 '2차 피해'로 볼 수 있는 상황이다.

가해자 부모들에게는 자신의 아들이 저지른 범죄의 엄중함과 피해자가 입었을 상처보다는, 곧 '의사'가 될 자랑스러운 아들의 미래에 남을 오점이 더 큰 문제였고 걱정거리였다. 피해자가 '합의'를 해주면 아무 일도 없던 것이 되어 자식이 문제없이 의사가 될 것이라는 생각만 온통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라는 고려대 의대 가해 남학생들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피해 여학생은 신고와 상담 이후에도 가시지 않는 충격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사건이 알려진 뒤 고려대 재학생과 졸업생들은 가해 학생들을 출교하라는 항의와 1인시위를 벌였다. 언론과 사회의 비난도 고조됐다. 사건 발생 3주쯤 뒤인 6월14일, 서울 성북경찰서는 "세 명이 장시간 추행했다는 점에서 범죄의 중대성이 인정되고 서로 말을 맞춰 범행을 부인할 가능성도 있다"며 남학생 3명에 대해 '특수강제추행'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틀 뒤 법원은 구속영장을 발부했고, '고대 의대생' 셋은 구속 수감됐다. 경찰 수사를 통해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사실관계'는 확인됐고 범죄 혐의 입증에 대한 충분한 소명이 이뤄졌다는 얘기다. 하지만 고려대 의대 교수들 사이에서는 '출교해야 한다'는 의견과 '너무 가혹하다'는 동정론이 나뉘어 논쟁이 벌어졌다. 대학 쪽이 징계 수위를 정하지 못하고 시간을 끄는 사이 고려대 의대에 대한 사회적 비난은 높아져 갔다.

재력과 사회적 지위를 갖춘 가해자와 가족들은 사죄와 반성 대신 반격과 방어를 택했다. '초호화 전관 변호인단'이 구성된 것이다. 기소된 세 사람 가운데 박아무개씨와 한아무개씨는 고등법원장, 고검장 출신 등 전관 변호사가 유난히 많은 것으로 알려진 한 로펌에 변호를 맡겼고, 이들에 대한 변론은 서울중앙지법 판사를 지낸 변호사 등 세 명이 전담했다. 가해자 배아무개씨는 별도로 유명 판사 출신이 포함된 개인 변호사 두 명과 로펌 두 곳에 소속된 변호사 다섯 명 등 모두 일곱 명을 집단 선임했다. 당시에 신기남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변호인단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사회적 비난이 일었고, 신 전 의장은 '나도 모르게 이름이 올라갔다'며 변호인단에서 사퇴한 일도 있었다. 이후 다른 일부 변호인들도 논란에 부담을 느끼며 변호인단에서 물러났다.

공판이 진행되면서 피고인 중 박씨와 한씨는 혐의를 모두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죄했지만, 배씨는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배씨는 "다른 두 학생이 피해 여학생의 방 안에 들어갔을 때 나는 차 안에 있었고, 술에 취해 잠을 잤을 뿐 그사이 뭘 했는지는 기억을 못하겠다"며 평소 술 마시면 바로 잠들고,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른다'며 '잠버릇'을 입증해줄 친구 두 사람을 증인으로 요청했다. 배씨의 주장에 한 시민단체가 지원하며 가세했고, 일부 인터넷매체도 '배씨가 오히려 피해자'라는 기사를 연이어 게재했다. 그사이 가해자가 피해자의 인격을 깎아내리고, 인격장애로 몰아붙이는 '설문조사'를 고려대 의대 학생들을 상대로 벌인 사실이 밝혀지면서 파장이 일었다. 설문 내용은 피해자가 '평소 이기적인지 아닌지', '평소 사생활이 문란한지 아닌지', '사이코패스인지 아닌지' 등을 묻는 것이었다.

'비공개 증인 심문'에 몸서리친 피해 여성

피해자는 그동안 성폭력 피해뿐 아니라 가해자 쪽의 합의 종용과 비방 및 헛소문, 모욕적인 설문조사와 가해자 편을 드는 시민단체와 인터넷언론 등으로 인해 정신과 치료 없이는 버티기 힘든 2차, 3차 피해에 시달리고 있었다.

법정에서는 방청객이 없는 장소에 피해자를 위치시키고 비디오 장치를 통해 '비공개 증인 심문'을 실시했다. 피해자는 피고인 배씨와 그의 어머니에 대해 극도의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재판부에 변호인의 동석을 요청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헌법과 형사소송법에 규정된 권리이지만 피해자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비록 형사소송법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는 피해자 심문 때 재판에 지장을 줄 우려가 있는 등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신뢰관계에 있는 사람의 동석을 허용한다고 돼 있지만, 변호사를 '신뢰관계에 있는 자'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재판부의 입장이었다. 결국 방청객을 모두 내보낸 법정에는 재판부와 검사, 그리고 피고인들과 네 명의 피고인 쪽 변호사, 피고인 가족들이 모니터 속 피해자를 상대하게 됐다. 네 시간 가까운 피해자 심문 과정은 밖에서 고성이 들릴 정도로 격앙돼 있었고, 피고인 배씨 변호인과 그 어머니에 의한 피해자 대상 질문의 공격성과 집요함이 도를 넘을 정도였다.

피해자에 대한 비공개 심문이 끝난 뒤 열린 공개법정에서는 피고인이 요청한 증인들에 대한 심문이 이어졌는데, 피고인 배씨 쪽 변호인은 배씨의 친구인 의대 동기생을 대상으로 피해자가 평소 '문란한 이성관계'였다는 것과 피고인이 잠들면 업어 가도 모르는 잠버릇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집요하게 질문을 해댔다. 재판 이후 피해자의 정신적 상처는 갈수록 심해져 '우울증'과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받고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도 못 자게 됐다.

사건 발생 뒤 4개월이 지난 2011년 9월30일 선고공판이 열렸다. 재판부는 주범 격인 박씨에 대해 검찰이 구형한 징역 1년6개월보다 높은 징역 2년6개월 형을 선고했고 한씨와 배씨에게도 각각 1년6개월 형을 선고했다. 3년 동안의 신상정보 공개 명령도 내려졌다. 그동안 '성추행' 범죄에 대해 내려진 형량 등과 비교하면 이례적이라고 평가될 만큼 높았다.

피고인들은 너무 형량이 무겁다며 항소했다. 이들은 특히 1심 재판부가 "술에 취해서 한 행동이라는 점을 간과하는 등 범행 당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너무 과중한 처벌을 내렸다"고 반발했다. 이른바 '음주 감경'을 적용하지 않은 것이 위법이라는 주장이었다. 피해자는 상처와 두려움을 극복하고 항소심 공개 법정에 출석했다. 피해자가 없는 법정에서 피고인 쪽이 피해자에 대한 모략과 음해를 하며 상황을 왜곡해 혹여 감형을 받게 될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법정에서 "사건이 발생한 지 여섯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상처가 계속되고 있다… 피고인 배아무개씨가 자살 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매일 그 생각을 하며 수면제를 먹어도 잠을 못 자고 있다… 내가 평생 가져갈 고통과 나에 대한 험담과 뒷소문을 생각하면 1년6개월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며 재판부에 엄벌을 내려줄 것을 부탁했다.

2012년 2월3일,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서울고법은 1심과 같이 박씨에게 징역 2년6개월, 한씨와 배씨에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6년 동안 친하게 지낸 의대 동기가 술에 취해 잠이 들자 편하게 자게 조치하기는커녕 범행을 공모해 순차적, 연속적으로 추행했다… 사건 후 피해자의 신상이 공개되고 외상후 스트레스로 정상적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2차 피해가 크고, 피해자의 처벌 의지가 확고한 점 등을 봐서 집행유예 판결은 어렵다"고 밝혔다.

한씨는 상고를 포기했지만 박씨와 배씨는 대법원에 상고했다. 2012년 6월28일, 대법원도 원심을 그대로 확정했다. 배씨 어머니는 선고 직후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며 실신해 들것에 실려나갔다. 한편 고려대 의대는 2011년 9월 징계위원회를 열고 세 명의 가해 학생에 대해 최고의 중징계인 '출교' 처분을 내렸다. '퇴학' 처분을 받으면 재입학해 의사가 될 수 있지만, 출교 처분을 받으면 학적이 삭제되고 재입학이 불가능하다.

항소심 공판이 한창 진행중이던 2011년 12월27일, 검찰은 피고인 배씨와 그의 어머니를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조사 결과 이들은 사건 발생 직후인 2011년 6월, 고려대 의대의 한 동아리 방에서 21명의 학생들에게 '피해 학생이 평소 이기적이고 인격장애가 있으며, 가해 학생들이 그나마 피해 학생의 학교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왔고, 강제추행 사건 역시 피해 학생의 인격장애적 성향 때문에 부풀려진 것'이라는 내용의 사실확인서를 나누어준 뒤 서명날인을 받았다. 성추행 사건의 대법원 유죄 확정판결이 내려진 뒤인 2012년 8월22일, 서울중앙지법은 모자 피고인의 피해자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리고, 각각 징역 1년 형을 선고했다. 이미 성추행으로 수감된 배씨에게는 징역 1년이 추가되었고, 배씨의 어머니는 법정 구속된 뒤 수감됐다. 하지만 항소심에서 피해자가 합의를 해줘 징역형이 아닌 각각 벌금 500만원으로 감형됐다.

'고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은 전도유망한 최고의 엘리트들이 저지른 파렴치한 범죄라는 것 말고도 반성하지 않고 거짓말과 피해자 회유로 상황을 모면하려 하고 허위사실 유포로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하면서까지 책임 회피를 하려 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특히 가해자들의 부모가 재력을 앞세워 대형 로펌과 고위급 전관 변호사들을 내세워 판결을 '합법적으로 매수'하려 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결국 이들의 값비싼 저항은 이례적인 중형으로 이어졌다. 물론 피해자의 용기있는 신고와 물러서지 않는 용기가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초기에 가해자들이 진심으로 사죄하고 피해자의 선처를 구했더라면 형량이라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아, 그것은 '윤창중 사건'의 예고편

최근 발생한 '윤창중 사건' 역시 유사한 패턴을 보였다. 청와대 대변인이 미국 정상회담 수행 중 자신을 돕는 인턴 여학생과 부적절한 술자리를 가지면서 성추행을 저질렀다. 이후 경찰 수사를 피해 한국으로 '도주'한 뒤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혐의를 부인했다.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윤창중의 일방적 주장과는 다른 정황들이 드러나면서 국민은 분노했고 여론은 들끓었다. 청와대와 정부, 국가의 위상도 추락했다. 차라리 초기에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잘못을 인정한 뒤 조사에 응했더라면 법에 의한 응당한 처벌과 사회적 비난 등 '최소한의 피해'로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 사건 역시 피해자의 용기있는 경찰 신고가 없었다면 권력과 위력으로 무마해 버렸을 가능성도 크다. 여전히 성폭력 신고율이 낮은 대한민국, 윤창중 사건을 소개하는 외신에서 '직장내 성추행이 관행으로 인정되는 나라'라는 비아냥을 받고 세계 135개국 중 성평등 순위가 108위에 그치는 사실로 조롱당하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피해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신고해줘야 한다. 경찰은 피해자를 철저히 보호하고 사회는 피해자를 감싸고 가해자의 피해자 협박·회유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해야 한다.

윤창중 사건에서는 미국 국무부 관계자가 우리 대통령 전용기에까지 찾아와 '피해자에게 접촉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미국에서는 이미 1980년대에 '성폭력피해자 방패법'(Rape Shield Act)이 제정돼,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피해자의 과거 행적이나 평판 등에 대해 법정에서 질문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법정은 '피해자 괴롭히기'를 통해 소송을 취하하게 하거나 이미지 손상을 야기해 피해자 진술의 증거 가치를 떨어뜨리려는 비열한 변호 방법을 허용하고 있다. 성폭력 대책은 '4대악 척결' 같은 구호와 실적 경쟁이 아닌, 피해자 보호와 지위 고하를 막론한 엄정한 법 집행, 성인지와 인권의식 향상 등의 근본적인 처방이 포함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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