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30대 동성애자의 고백.. 직장에서도 야한 사진 권하며 "성전환수술 할 거니"

곽희양 기자 2013. 5. 16.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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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알게 된 가족 "특이병.. 때리면 고칠 수 있다"

김형태씨(30·가명·사진)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짝사랑에 빠졌다. 같은 반 친구였다. 바라만 봐도 두근두근 떨렸고, 눈을 감으면 그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 느낀 설렘이었다. 형태씨는 '이건 사랑이 아냐'라며 수없이 자신의 감정을 부정했다. 부정할수록 감정은 짙어졌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남자였다.

죽고 싶었다. 남자를 좋아하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할 수 없었다. 형태씨는 자신이 돌연변이나 외계인이 아닌가라고 의심했다. 그럴수록 더 의기소침해졌다. 그를 유심히 지켜본 선생님은 "형태야, 너 지금 죽고 싶단 생각 하는 것 아니지"라며 염려했다. 하지만 남자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남몰래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동성애'라고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감정을 들킬까봐 짝사랑하는 친구와도 일부러 거리를 뒀다.

형태씨가 22살이던 해 어느 눈 오는 밤. 그는 평소처럼 짝사랑하는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다 "감기 조심해라. 춥다"고 말했다. 친구는 "네가 걱정해주니까 무섭다. 나는 여자가 좋다"고 강경한 목소리로 답했다. 고백 한번 못해본 채 6년간의 짝사랑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펑펑 울었다. 역시 '내 편은 없구나'라는 생각에 억울하고 서러웠다. 상처받는 게 두려워 대학 4년간은 아르바이트와 학업에 바빠 연애에 관심없는 이성애자인 것처럼 지냈다.

하지만 '내가 아닌 나'로 살 순 없었다. 적어도 한 명에게만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었다. 어렵게 친형에게 말을 꺼냈지만, 그의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형에게 누군가는 "때리면 고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형에게 소식을 전해들은 누나는 "특이병에 걸린 것이니 곧 나을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매번 TV나 인터넷에서 동성애자를 변태성욕자로 왜곡되게 묘사한 것을 보고 "너도 그러느냐"고 물었다. 평생을 같이해온 가족이 자신보다 TV에서 얻은 잘못된 정보를 믿는 것 같아 배신감이 치솟았다. 형태씨는 "집이 전쟁터였다. 내 존재를 인정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큰 전쟁을 벌이는 것 같았다"며 "집에서 밥을 먹으면 매번 체할 만큼 불편해 결국 독립했다"고 말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8살이 되던 해 친분이 있던 동료 3명에게 자신의 존재를 털어놨다. 각각 "네가 잘못 안 걸 거야" "네가 여자 경험이 없어서 그래" "너 성전환수술 하는 거니"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들은 형태씨에게 야한 사진을 권했고, 회식 때 일부러 노래방 도우미를 불렀다. 무시와 조롱을 받는 기분이었다. 형태씨는 " '왜 네가 남자를 좋아하는지 설득해보라'고 사람들은 요구하는데, 왜 내가 내 존재를 설득해야 하는 거지. 나는 그냥 있는 건데"라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형태씨는 직장을 옮겨야 했다. 새로 옮긴 직장에서는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주변에 얘기하지 않고 있다. 동료가 '여자친구가 왜 없느냐. 설마 남자 좋아하는 건 아니지'라며 농을 건넬 때마다 '저는 동성애자인데, 그런 말 말아주세요'라고 속으로만 되뇐다. 입 밖으로 꺼냈다가 해고를 당하거나 연봉이 깎일지도 모를 것 같아서다.

표현하지 못할 답답함과 조롱 속에서 스물아홉 해를 보내던 그에게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은 동성애자를 다룬 영화 < 종로의 기적 > 을 보면서부터다. 그는 이 영화를 13번이나 봤다. '내가 받는 고통이 당연한 게 아니구나. 이제 더 이상 어떤 사람인 척하며 살아가는 것 말고 진짜 나답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희망에 찬 눈물이 솟았다. 그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고백했고, 어머니는 그를 인정했다. 언젠가는 아버지에게도 털어놓을 생각이다. 형태씨는 "나답게 살고 싶어서 성소수자 단체의 활동에도 참여하게 됐다"면서 " '네가 동성애자건 말건 상관 안 할 테니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숨죽이고 살아'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차별적인 태도와 싸워 나가는 것이 내 존재를 인정받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힘이 돼주는 사람들도 있다. 한 성공회 신부가 운영하는 교회는 그가 동성애자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를 지지한다. 그는 이 교회에서 동성애 혐오론자에 대한 미움을 치유한다. 그의 친구들은 "네가 '아웃팅'(본인은 원치 않는데 제3자에 의해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폭로돼 비난받는 상황) 당하면, 우리가 함께 싸워줄게"라며 그를 응원한다. 과거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보수적인 연애관을 가진 형태씨는 요즘 1년 가까이 사귄 애인과의 미래를 상상한다. '만약 결혼하면 어떤 일상을 누리게 될까'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하지만 이 꿈들이 현실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형태씨는 "지금 꾸는 꿈들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지금 내가 살아 숨쉬는 게 아닐까"라고 말했다.

< 곽희양 기자 huiyang@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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