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여성 일자리'인가]불임 끝 임신한 간호사에 "네 순서가 맞느냐".. 임신순번제라는 굴레

특별취재팀 2013. 5. 3.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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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월 전 ㄱ병원 간호팀에 생긴 일

5개월 전 서울의 ㄱ종합병원 ㄴ병동 간호팀에 기막힌 상황이 발생했다. 전체 간호사 23명 중 4명의 출산시기가 겹친 것이다. 2012년 말 간호사 3명이 1주일 사이에 아이를 낳았고, 1개월도 안돼 간호사 한 명이 추가로 출산했다.

수간호사 한 명과 주임간호사 2명을 빼면 현장 인력은 20명이다. 5분의 1이 거의 동시에 출산휴가를 가야 하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당시 이 병동에는 간호사들의 근무표 조정을 놓고 대혼란이 일었다.

내막은 이렇다. 이 병원은 간호사 순번임신제를 두고 있었다. 한꺼번에 임신하게 되면 업무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명목으로 임신을 순번제로 정하는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사라진 용어지만 여전히 상당수 대형병원에서는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다. 순번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어떻게 한꺼번에 4명이 임신을 하게 됐을까.

임신한 간호사가 지난달 22일 서울의 한 종합병원 병동에서 서서 일하고 있다. 3교대로 격무에 시달리는 간호사들 사이에 임신순번제가 암암리에 이뤄지고 있다. | 정지윤 기자

▲ 입원병동, 한 명 임신하면 나머지 사람 야근 늘어임신부도 눈치껏 야간근무… 반강제 자필 서약서도 써야

4명 중 2명은 불임으로 고생하던 간호사였다. 13년차 불임 간호사가 시술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불임치료를 받아온 또 다른 간호사는 당연히 자기 차례로 알고 시술을 받았다. 그러나 앞서 실패한 13년차 간호사가 통상 1~2개월의 시차를 두지 않고 바로 시술받은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공교롭게 두 명은 '다행히' 모두 아이를 가졌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른 두 간호사도 연이어 임신했다. 10년차 간호사는 둘째를 갖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던 중 우연히 애가 들어섰다. 게다가 다른 13년차 간호사가 또 아이를 임신하면서 상황은 더 꼬였다.

동시에 임신한 간호사들은 가시방석이었다. 최대 두 명 정도까지 겹치면 출산휴가를 당기고 미뤄서 겹치지 않도록 하지만 3명을 넘어가면 업무조정이 복잡해진다.

빡빡한 일정으로 돌아가는 간호사 업무에서 동료끼리 미리 약속한 일정을 지키지 않는 동시다발적 임신은 비상상황을 뜻한다. 근무일정을 관리하는 수간호사의 일성도 축하가 아니라 "네 (임신)순서가 맞느냐?"였다.

수간호사의 추궁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수간호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임신한 간호사를 불러 세워서는 "굳이 또 낳아야 되겠느냐" "너희가 근무계획을 짜라"고 윽박질렀다. 간호사 박순미씨(33·가명)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할 생각까지 들었다"고 말했다. 박씨는 "간혹 순번이 아닌데 다른 사람과 겹쳐서 애가 들어서서 몰래 중절시술을 받은 경우도 봤다. 특히 계획에 없이 둘째나 셋째를 우연찮게 임신한 경우가 그렇다. 말을 못해서 그렇지 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씨 자신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는 2010년 9월 아예 선배들에게 "올해 말에 둘째 아이를 갖겠다"고 공언한 뒤 가족계획표에 따랐다. 말하자면 3개월 전 미리 임신순번표에 도장을 받아놓은 것이다. 그러나 불임으로 고생하던 선배 간호사가 그해 12월 시술에 성공하자 박씨는 '미운오리'가 돼버렸다. 둘은 1주일 차이로 출산했다. 역시 수간호사는 "네 순서가 맞느냐"고 따졌다. 김씨는 "미리 신고까지 한 뒤 아이를 가졌고, 선배의 불임시술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억울했다"며 "매번 동료들에게 언제 아이를 만들지 일일이 물어볼 수도 없고 사람 일이 뜻대로 안될 때도 있잖으냐"고 말했다.

간호사들은 오래 서서 일하고 3교대로 밤샘근무까지 하느라 불임이나 유산하는 경우가 잦다. 이렇게 되면 동료들은 아이를 갖고 싶어도 순서가 될 때까지 1~2년도 기다려야 한다.

임신순번의 맨 앞자리 그룹은 나이 많은 선배나 불임을 겪는 간호사들이다. 두 번째 순위는 둘째를 낳으려는 사람. 이때도 역시 선배가 우선이고 또 첫째와 터울이 긴 사람의 순번이 앞선다. 기다리다 못해 아예 아이를 먼저 만들어 결혼하는 '끼어들기 반칙'도 나오기도 한다.

지난해 7월 첫아이를 낳은 김지영 간호사(32·가명)는 "요즘은 임신순번을 직접 압박하는 경우는 별로 없지만 은연중에 순서를 정하는 건 여전하다"고 말했다. 실제 번호표를 만드는 대신 암암리에 간호사끼리 알아서 또는 선배에게 물어서 임신순서를 정하는 식이다. 김씨는 "전에는 간호사들이 결혼하거나 임신하면 그만두는 풍토였는데 요즘은 계속 근무하는 여성들이 많아졌다"며 "가임기 여성이 늘자 수간호사는 '언제 임신계획이 있느냐'고 계속 물어본다. 한 명이 임신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너희는 천천히 애 가져라'는 식으로 말한다"고 밝혔다. 한 병동에서 3명 이상이 동시에 임신하면 마지막에 임신한 한 명은 다른 병동으로 옮겨버린다. 당사자에겐 페널티이자, 임신 대기자들에게는 무언의 압박으로 작용한다.

입원병동 간호사는 월평균 5~6번씩 밤샘을 하는 '야간근무(오후 10시30분~오전 8시30분)'를 한다. 이때 한 명이 임신하면 나머지 사람의 야간근무가 월 6~7개로 는다. 지난해 7월 ㄱ병원의 한 병동처럼 3명이 한꺼번에 임신하면 한 사람당 야간근무가 3~4개나 늘어난다. 일부 병원은 노사합의로 7개 밤샘근무를 하면 하루는 잠을 자도록 휴무를 주기로 했지만 인력 부족으로 쉬는 게 쉽지 않다.

임신부나 출산 뒤 1년 안에는 밤샘근무를 안하는 게 원칙이지만 현실은 다르다. 김씨는 "다른 사람에게 눈치보여 임신부 스스로 야간근무도 한다"며 "그때는 반드시 '내가 원해서 한다'는 자필 서약서를 쓰게 한다"고 말했다. 자발적인 형식을 띠지만 반강제로 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김씨는 "노조가 없는 중소병원 같은 데는 더 심각하다"고 전했다.

최소인원으로 버티는 현재 인력구조에서는 남은 사람들의 부담이 커지기 때문에 간호사들끼리 눈치를 볼 수밖에 없도록 해놓았다. 병가나 경조사만 생겨도 힘든데 3개월 출산휴가는 부담이 크다. 박씨는 "10개 수술실이라면 간호사가 최소한 5~6명은 더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화장실 갈 시간도 없다"며 "이러다가 사고라도 날까 조마조마하다. 간호사들이 짜증이 극에 달한 상태여서 당분간 애 갖는다는 말도 못 꺼내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전병역(산업부)·김재중(정책사회부)·남지원(사회부)·이혜인(전국사회부)·이재덕(경제부) 기자

< 특별취재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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