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여성 일자리'인가]창업회사 9년 헌신.. "임신" 말 한마디에 강제 퇴사 당해

특별취재팀 입력 2013. 5. 3. 06:04 수정 2013. 5. 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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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 여름. 대학을 졸업한 김정은씨(35·가명)는 부산의 '작은' 무역회사에 입사했다. 사원은 3명. 사장에 남자직원, 그리고 그가 전부였다. 회사는 갓 간판을 올렸다. 사실상 창업멤버였다.

사장은 가족을 강조했다. 손잡고 회사를 키워보자. 해외에 거래처를 만들고, 경리·회계는 물론 온갖 잡무도 그의 몫이었다. 컴퓨터가 고장나면 그가 고쳤고, 복사기에 용지가 걸리면 사장은 그를 찾았다. 사무실 안에 그의 손이 닿지 않는 업무는 없었다. 요즘 화제인 TV드라마 <직장의 신>에 등장하는 딱 미스김씨였다. 미스김씨와 유일하게 다른 점은 정규직. 입사 첫해 연봉은 1600만원이었다.

회사는 쑥쑥 컸다. 몇 년 만에 직원은 10명으로, 연 매출은 20억원대로 늘어났다. 그사이 사장의 차는 카렌스에서 벤츠로 바뀌었다.

사장 다음으로 오래 일한 직원이자 유일한 여자인 그도 차장까지 승진했다. 연봉도 4000만원으로 올랐다. 2년 늦게 입사한 남자직원이 자신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는 걸 알게 됐을 때는 화도 났지만 견딜 수 있었다. 자신이 키워낸 회사라고 생각했다.

2010년, 임신을 확인했다. 9년 동안 헌신한 회사를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출산 후에도 일할 준비를 시작했다. 친정어머니로부터 아이를 봐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회사 사무실 건너편으로 이사하려고 집도 알아봤다. 점심시간에 들러 수유도 할 수 있고, 아이가 아프거나 할 때 일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출산휴가 중에 집에서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재택근무가 가능한 시스템도 갖춰놨다.

배가 불러오던 어느 날 사장이 불렀다. "내 아내도 회사 다니는 것 알지? 아이 때문에 결근·조퇴가 잦은 편이야. 김 차장과 함께 일하기 어렵겠어." 사장을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른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일처리를 잘못한 게 있나. 떠오르는 게 없었다.

사장의 성격을 다시 떠올렸다. 사장은 '남자가 하는 일은 대체 불가능하지만, 여자는 단순 업무만 하는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실제 그의 일은 모두 대체 가능했다. 그가 물꼬를 튼 해외 거래처들은 기반이 잡힌 만큼 다른 누군가가 해도 문제가 없다. 더구나 그의 연봉이면 전문대 나온 '어린' 여직원 두 명을 채용할 수 있다.

짐을 쌌다. 이렇게 회사를 그만둘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출산 한 달 전 회사를 나왔다. 그때 태어난 딸이 이제 두 돌. 재취업을 시도해봤지만 쉽지 않아 접었다.

법은 고용 유형·기간에 상관없이 임신여성에게 90일의 출산휴가, 1년 이상 근속한 노동자에게는 1년 이내의 육아휴직을 주도록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작은 기업은 사내의 모든 일이 사장 뜻대로 이뤄진다. 출산휴가·육아휴직도 법 규정이 아닌 자비의 범주에 속한다.

현재 한국의 여성 노동자 1060만명 중 90%는 중소기업에서 일한다. 통계청은 2012년 경력단절로 퇴사한 여성 노동자가 197만9000명이라고 밝혔다. 이 중 4분의 1인 47만9000명이 임신·출산을 이유로 회사를 그만뒀다. 다수의 직장여성에게 임신은 축복이 아니라 사직 통지서의 다른 말이다.

전병역(산업부)·김재중(정책사회부)·남지원(사회부)·이혜인(전국사회부)·이재덕(경제부) 기자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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