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기적'.. 폭력 입다물던 학생들 두달새 155건 소통

2013. 4. 22.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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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 안 알리고 고발' 새 앱으로 고교 1곳 700여명 실험해보니

[동아일보]

《 메시지가 왔다. "김준석(가명), 군용 칼 2개 들고 다녀요." 학생이 군용 칼을 들고 학교를 다닌다니…. 이모 교사는 그냥 넘어가기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방과후 수업 중인 준석이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잠깐 가방 들고 학생부실에 오겠니." 둘만 있는 학생부실에서 가방을 열었다. 군대에서나 쓸 법한 묵직한 대검 2개가 나왔다. 그런데도 준석이는 태연했다. "칼 수집이 취미라 가지고 다녀요." 도로변 잡상인에게서 구입했다고 했다. 이 교사는 "이건 불법무기 소지다.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몇 달 전, 다른 학교의 고교생이 가방 속의 칼을 꺼내 친구를 찌른 사건도 얘기했다. 40분가량 듣던 준석이. 결국 눈물을 보였다. "그냥 취미로 생각했는데…. 잘못했어요." 충북 A고교에서 지난달 11일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준석이가 흉기를 들고 다닌다는 사실을 이 교사는 어떻게 알았을까. 》

○ 통로를 만드니 말이 쏟아져

동아일보 취재팀은 학생들의 목소리, 교실 안 풍경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기로 했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은 학생들이 가장 잘 아니까, 익명을 전제로 제보하는 시스템을 갖추면 가능하다고 봤다. 정부가 1년에 두 번 하는 학교폭력 실태조사로는, 학교 곳곳에 설치한 폐쇄회로(CC)TV로는 학교폭력을 크게 낮출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정보기술(IT)업체 레드퀸이 개발한 애플리케이션 '마스크챗(Mask Chat)'을 활용했다. 카카오톡은 익명의 대화가 불가능하다. 일반 문자메시지는 발신번호를 지우면 쌍방향 소통이 되지 않는다. 마스크챗은 카카오톡과 비슷하지만 실시간 익명대화가 가능한 신형 메신저다. 충북 A고의 학생 700여 명이 참여했다.

학생들은 2월부터 4월 초까지 155건의 '목소리'를 남겼다. 내용별로는 △폭력·따돌림 29건 △담배·음주·절도 37건 △일반 상담(집안문제 등) 16건 △진로 및 학업 상담 21건 △기타(건의 및 칭찬글 등) 52건이었다. 교사들은 실시간 메시지를 통해 문제를 파악하고 막았다.

지난달 말이었다. 3학년 학생 한 명이 2학년 사물함 근처에서 서성댔다. 1, 2학년이 수학여행 가고 없는 틈을 타서 축구화를 훔칠 작정이었다. 다른 3학년 학생이 복도에서 이 장면을 목격해 마스크챗으로 바로 제보했다. 문제의 학생은 그 자리에서 잡혔다. 이후에 비슷한 도난 사고는 더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학생은 메신저로 '자살 충동'을 알렸다. 교사는 "심정을 이해한다"며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서로의 생각을 나누면서 신뢰가 쌓였다. 사흘 정도 지났을까. 학생이 메시지를 보냈다. "만나고 싶어요."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나눌수록 학생의 표정이 밝아졌다. 상담이 끝나고 학생이 말했다. "메신저 그리고 선생님 덕분에 덜 외로웠어요. 이젠 마음이 좀 편해졌습니다."

처음 며칠은 장난스러운 내용이 많았다. 열흘쯤 뒤에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야자(야간자율학습) 시간에 A가 B를 때렸다. 얼굴에서 피가 흐른다"는 식의 진지한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동생에게 미안해 참는다는 얘기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긍정적인 내용 역시 많아졌다. "××가 쓰레기통의 쓰레기를 꺼내 분리수거했어요." 다른 학생이나 교사를 칭찬하는 글이 늘었다. 학급운영 방안 및 수업방식과 관련한 건의도 이어졌다. 교사들이 소통의 창구를 마련했더니 학생들은 마음의 문을 열었다.

○ 침묵하는 다수를 깨워라

정부는 국가 차원의 학교폭력 예방교육 프로그램을 지난달 마련했다. '키바 코울루(KiVa Koulu)'를 벤치마킹했다. 핀란드 정부가 학교 따돌림과 괴롭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 키바 코울루는 '침묵하는 다수'에 주목한다. 모든 학생을 방관자가 아닌 참여자로 만들면 학교폭력을 없앨 수 있다고 본다.

마스크챗 개발자 역시 이렇게 생각했다. 핀란드와 다른 점은 오프라인이 아니라 온라인, 즉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라는 점이다.

A고 학생들은 처음에는 이 메신저를 불신했다. 고자질이라 생각했다. 도난사건과 폭력이 줄어드는 등 학교 분위기가 좋아지자 참여자가 늘기 시작했다. 가장 주목할 부분은 흡연율. 두 달 만에 거의 '제로' 수준으로 떨어졌다.

3월 중순쯤 되자 익명의 제보를 의식해 학생 스스로 행동에 조심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신모 군(3학년)은 "메신저 덕분에 이젠 힘없는 아이, 저학년들도 발언권이 생겼다. 모든 학생이 평등해져 좋다"고 했다. 김모 군(3학년)은 "선생님과 가까워졌다. 친구들끼린 이제 '천사 메신저'라 부른다"며 웃었다.

키바 코울루 개발에 참여한 핀란드의 사나 헤르카마 선임연구원은 본보에 보낸 e메일을 통해 익명 메신저를 이렇게 평가했다. "키바 코울루를 모바일로 확장시킨 게 놀랍다. 훌륭한 통찰이자 중요한 혁신이다."

미국의 유명한 학교폭력 고발 다큐멘터리인 '불리(Bully)'를 보면 학교폭력에 시달리다 자살한 학생의 아버지가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아버지는 "아들이 괴롭힘을 당할 때 옆에 있던 학생 한 명만 용기를 북돋아 줬다면 최악을 막았을 것"이라고 흐느꼈다.

한 교육업체의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기 폭력의 57%가 교실이나 복도 등 학내에서 일어난다. 대다수 학생이 일상적으로 지내는 공간에서 학교폭력이 일어나는 셈이다. 다시 말하면 또래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학교폭력 방지에 최선책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안동현 한양대 교수(정신건강의학과)는 "10대는 자살 등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직전에 신호를 보낸다. 익명 메신저는 구원의 메신저가 되고, 방관자를 방어자로 바꾸는 힐링 메신저 역할까지 가능하다"고 말했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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