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그래, 봄이지.. 나의 '벚꽃 엔딩'은 이거야
[동아일보]
고심 끝에 입학한 불어불문학과는 내게 고작 1년간의 행복도 허락하지 않았다. 첫 한 학기는 고교 제2외국어 교육의 뒷심으로 버틸 수 있었다. 학교생활도 나쁘지 않았다. 새내기였으니까. 문제는 1학년 2학기 초급회화(2) 시간에 불거졌다.
교수님은 프랑스 TV 뉴스의 정통 발음을 감상해보자며 영상물을 재생했다. 남자 앵커의 목소리를 들은 뒤 난 깨달았다. 이건, 아니란 걸. 불어의 억양은 하나뿐이다. 평탄하게 가다 문장 끝만 올려주는 것. 여자 분 것까진 괜찮았다. 남자 앵커의 억양은 뭐랄까…. 화이트 초콜릿 모카 위에 휘핑크림을 고봉(高捧)으로 얹은 뒤 친한 친구와 입을 맞대고 흡입하는 느낌쯤?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 속 솜사탕 키스처럼.
불어책보다 팝 가사와 음악잡지를 60배쯤 많이 읽었던 5년의 학부 생활 동안 유일하게 내 맘을 흔든 텍스트는 라신의 17세기 고전비극 '페드르'였다. 궁정에서 벌어지는 막장 드라마와 그 등장인물이 대사로 주고받는 폭풍 같은 각운(脚韻) 릴레이는 마치 1만 분짜리 랩을 읽는 듯했다. 구절구절 소름 끼쳤다. 요즘 랩은 랩도 아니다.
5년 뒤 내 맘을 다시 강탈한 불어는 프랑스 포스트 메탈(post-metal) 밴드 알세스트의 앨범 '다른 세계의 기억'에 담긴 노래 '에메랄드빛 봄'이었다. 리더 네주(neige·눈·雪)는 어릴 때 꿈에서 봤다는 '다른 나라'의 풍경을 소리로 옮겨냈다. 전자기타 소리를 잔뜩 일그러뜨린 뒤 긴장음을 포함한 화성을 연주해 내는 몽환적이고 강렬한 악곡과, 네주의 여린 천사 같은 보컬은 낙차 큰 대비를 이루며 그 세계로 인도한다.
5분 24초부터 종결부를 장식하는 블래스트 비트(헤비메탈에 많이 쓰이는, 분당 박자 수 180 이상으로 빠르게 드럼을 연타하는 주법)는 그 나라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여자 아이와 그를 좇는 남자 아이의 동선을 핸드헬드로 촬영하며 따라가는 청각적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숲의 끝은 꿈의 끝이다. 그래, 노트. 이 계절, 나의 '벚꽃 엔딩'은 이거였어.
'봄의 숲은/천국의 둥근 지붕,/에메랄드가 별처럼 총총히 박힌./나뭇잎들은 가벼운 바람에 춤추고/햇살은 그들을 보석으로 바꾼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오늘의 동아일보][☞동아닷컴 Top기사] |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전국 의대 19곳 교수들 “다음주 하루 휴진”
- [이진영 칼럼]건보 재정 거덜 낸 文케어, 의료 위기 초래한 尹케어
- [단독]北, 올초 국내 미사일-장갑차 핵심부품 기술 빼갔다
- 부산대 장기이식센터 교수 “어떤 경우도 병원 지킬것”
- 대통령실 “25만원 선별지원 논의 여지” 野 “액수-명칭 조정 가능”
- ‘尹 오찬’ 거절 한동훈, 前비대위원들과는 만찬
- 새벽 찬 공기에서 운동할 때면 숨이 가쁘다.
- 반성은 없이… 친윤 “원내대표 ‘답정이’”
- 국회의장 도전 정성호 “민주당 승리 깔아줘야”… 조정식-추미애 이어 의장 중립의무 위협 발
- [단독]삼성전자 900명, 연봉 5.1% 인상 거부… 계열 7곳, 노사현황 긴급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