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아

2013. 4. 6.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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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르포]친족 성폭력 생존자 은수연씨 북콘서트

같은 처지의 여친 이해하려은씨의 책 읽은 35살 남자"소리만 지르면 되는 건데그땐 아무것도 할 수 없었겠죠"같은 상처로 아파하는 23살 여자"아버지가 벌받아야 하지만잘 지냈을 때의 기억도 겹쳐요…"모든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야왕' 주다해처럼 살지 않아요원수를 사랑하지 않아도 돼요충분히 분노할 시간 필요하지만치유만이 삶의 목표는 아닙니다여러분 우리 같이 힘내요

▶ "네 잘못이 아니야." 변화라는 문을 여는 손잡이는 어쩌면 성폭력 '생존자' 자신만이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의 마음속 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는 있지요. 귀가 아플 정도로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겁니다. 그가 자신의 상처를 보듬으며 새로 시작할 수 있도록 그의 삶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이, 또다른 상처를 안고 사는 우리의 역할입니다.

"여러분들, 여기 왜 오셨어요? 저에게서 무엇을 들으러 오셨어요?"

주황색 조명 아래에 선 그가 물었다. 크고 낭랑하고 밝은 목소리였다. 청중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사람들에게 떨리는, 그러나 자신 있는 목소리로 이어갔다. 그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는,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한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대학교 1학년까지 9년 동안 목사인 친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친족성폭력 생존자' 은수연(가명)씨다.(<한겨레> 2012년 8월17일치 11면)

카페 청중 80여명 중 남성은 대여섯명

지난달 28일 저녁 7시 서울 마포구 동교동 가톨릭청년회관 1층 카페 안젤로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 주최로 은씨의 수기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의 북콘서트가 열렸다. 사전예약제로 진행된 북콘서트에 입장할 때 사람들은 휴대전화와 카메라, 녹음기 등 전자기기를 반납했다. 은씨의 책을 손에 든 80여명이 카페 안에 놓인 의자를 하나하나 채웠다. 대부분 10~30대 여성이었고 대여섯명의 남성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먼저 말하는 사람의 몫은 '용기'와 '책임'이다. 작은 체구의, 빨간 체크무늬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무대에 선 은씨가 힘있는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일반 독자와의 만남이 처음인 그는 미디어가 그려낸 성폭력 범죄의 '피해자'와 사뭇 달랐다. 몸짓은 발랄했고 큰 눈 옆으로 웃음의 흔적이 익숙하게 남아 있었다. 자신이 소개하듯 '도시의 평범한 비혼 30대 여성' 모습 그대로였고 성폭력반대단체가 말하듯 '생존자'였다.

"모든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드라마 <야왕>의 주다해처럼 이상하게 살지 않아요. 그 여자들이 이상한 이유가 성폭력이었다는 식의 생각이 싫었어요. 사람들이 어떻게 책을 낼 생각을 했냐고 물어보면, 그 사람이 한 짓을 이르고 싶었을 뿐이라고 했어요. (아빠를) 욕하면서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원해졌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욕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일을 그 사람과 나만의 비밀로 세상에 남겨두고 싶지 않았어요."

은씨의 책은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식지 <나눔터>에 연재하던 글을 묶어 세상에 나왔다. 아빠의 성폭력으로 초경 전에 임신을 해 낙태까지 한 삶을 견디기까지 '치유하는 글쓰기'가 도움이 됐다. 글로 자신의 상처를 풀어내면서 사람들에게 이해받기 위해 말을 쏟아내야 했던 과거의 구차함에서 벗어났다. 고통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수학능력시험 전날 호텔 스위트룸에 끌려간 이야기를 쓸 때는 너무 힘들었다.

"그 사람은 거울 속에 비친 일그러진 내 얼굴 표정을 욕하며, 바지에서 뺀 허리띠를 오른손에 더욱 단단히 감고 있었다. 때릴 준비를 마친 그 사람은 허리띠로 채찍질하듯 내리쳤다. 동그랗게 말린 내 몸의 껍질을 뜯어내려고 때리는 것 같았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중략) 샤워하려고 벗은 몸에 물까지 묻어 꼭 채찍질을 위해 준비된 것 같았다. 갈수록 아프고, 색다르게 아프고, 늘 처음 맞는 것처럼 아팠다… 나는 그 사람에게 사람이 아니라 생명이 없는 인형, 아니 물건이었다."(<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146~148쪽)

"다시 그 방에 갇혀 허리띠로 맞는 느낌이 들었어요. 낙태수술 받는 부분을 쓸 때는 온몸의 솜털이 삐죽 서 있는 느낌이 들 정도였어요. 그래서 일부러 그 호텔 앞을 지나는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서 호텔을 쳐다봤어요. 이겨내려고."

북콘서트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은씨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응원 온 자리였다. 처음 집을 나온 1994년께부터 동료이자 벗으로 은씨의 아픔을 나누었던 이미경 이화여대리더십개발원 특임교수와 은씨가 오빠 삼고 싶다는 '괜찮은 남자' 김두식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청중과의 대화를 주선했다.

어둠 속 객석에는 은씨와 다르지 않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은씨의 용기에 자극받아서일까. 말없던 사람들이 담아뒀던 말들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친족성폭력 범죄, 성폭력 범죄를 고발하고 그 범죄가 남긴 상처를 증언하는 목소리였다.

어느 고모부의 폭력, 아버지의 방관

"작년 가을에 아버지를 처음 신고했어요. 집을 나온 지금도 나는 아버지를 용서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요.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성폭력 사실을) 눈치챘음에도 안 들어줬어요. 이런 가족들 반응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아버지가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맞는데 아버지와 잘 지냈을 때의 기억도 겹치고… 어떻게 용기 낼 수 있었나요?"

속삭이듯 자신없는, 떨리는, 그러나 분명히 화가 난 목소리였다. 소처럼 눈이 크고 짧은 머리를 한 여성은 대학에 진학한 뒤 집을 나왔다는 23살 한마음(가명)씨였다. 그는 무대 아래 또다른 '자신'이 가해자이자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게 느끼는 양가감정을 토로했다. 은씨는 한마음씨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은씨의 눈도 어느새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은씨도 집을 떠나 아버지를 고소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7년형을 받고 수감된 아빠에 대한 탄원서를 받기 위해 노력하는 엄마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자신도 엄마가 판단능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던 폭력상황에서 같은 '피해자'였다고 인정하고서야 엄마를 이해했다며, 은씨는 자신처럼 치유의 길을 걷고 있는 이에 대한 공감을 전했다.

"음… 참 힘든 시간이었을 것 같아요. 감히 제가 이야기를 한다면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아도 돼요. '원수의 이빨을 부숴주십시오'라는 부분이 나오는 성경 '시편'을 좋아해요. 보통 교회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는데 제가 만난 전도사님은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그날 내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지금은 충분히 분노하고 충분히 억울해하는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시간이 지나서 객관적으로 떨어져서 보면 그때 힘들어해야만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영혼의 살인'이라는 성폭력 범죄 중 친족성폭력은 피해자가 폭력을 인지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지난해 한국성폭력상담소 성폭력 상담 통계를 보면, 친족과 친인척이 가한 성폭력 229건 중 피해자가 성인(20살 이상)인 경우는 51건(22.3%)뿐이었다. 청소년(14~19살) 71건(31%), 어린이 75건(32.8%), 유아 30건(13.1%)로 어린 피해자가 더 많았다. 북콘서트 행사를 진행한 한국성폭력상담소 김효진 활동가의 말이다. "아기였을 때부터 성폭력이 지속되다 보면 부모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 특별히 다른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 있어요. 가장 가까운 사람, 자신의 뿌리인 그 사람을 부정하고 분리해 생각하는 것이 어려운 거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생각하겠지만 그런 경우가 많아요. 부모도 못 믿는데 누굴 믿겠어요."

인간관계를 배워야 하는 가정에서 벌어진 성폭력은 '생존자'들의 남은 삶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한 젊은 여성도 관계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은씨에게 어떻게 좋은 사람을 만나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극복해 왔는지를 물었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도 연습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가시처럼 제멋대로 돋아난 마음의 상처를 드러내지 않고 잘 관리하고 스스로를 긍정하게 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의 아픔을 짧은 시간 내 다 말할 수는 없어 보였다. 한국경찰발전연구학회 2008년 가을호에 실린 '친족성폭행에 대한 양형인자의 영향'을 보면 친족에 의한 성폭력의 경우 지속기간을 중요한 양형 기준으로 삼았다. 폭력에 노출된 기간이 길수록 고민하고 아파하는 고통도 깊어진다.

"사실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어디까지 해야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부담스럽다고 도망가지 않을까? 창피한데,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등 오만가지 생각을 해야 해서 불편하기도 하다. (중략) 언제나 내가 말하고 싶은 걸 말할 수 있고, 지속적으로 노출해도 지치지 않는 대상은 진정한 힘이 된다. 이런 길고 긴 깊이 있는 노출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하고도 편하게 내 문제를 나누게 됐지 싶다."(<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192~193쪽)

콘서트 현장에 몇 없던 남성 청중인 유아무개(35)씨는 '생존자'의 아픔을 이해하고 싶다. 유씨는 자신의 여자친구가 초등학생 때 고모부에게서 성폭력을 당했는데 그녀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결혼을 약속한 자신에게마저 마음을 열지 못하는 상황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유씨는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딸의 피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해 여자친구 역시 상처를 드러내고 치유할 수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유씨 역시 초등학생 때 만화방 아저씨가 자신의 중요 부위를 만졌고, 대학생이 돼서 동경하던 동성 선배로부터 성폭력을 당할 뻔한 기억을 고백했다. 유씨는 책을 읽다 나흘을 앓았다. 은씨가 염려했듯, 인간의 사악함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직설적으로 묘사한 성폭력 장면들을 읽어내려가기가 너무 불편해서였다. 유씨는 이 자리에 남성들이 많이 오지 않아 아쉽다며 성폭력이 성의 문제이기 전에 폭력의 문제인 만큼 남성들도 비슷한 경험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자친구의 고모부가 어린 여자친구를 언니, 여동생이 다 한자리에 있을 때 만졌다는 거예요. 왜 소리를 지르지 않았냐고 하니까 말이 안 나왔대요. 그게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됐는데 돌아보니 나도 어릴 때 그랬던 거죠. 소리만 지르면 되는 건데, 그때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한 젊은 여성은 자신의 동생도 은씨 같은 '생존자'라며 잘 극복하도록 도와주고 싶어 이 자리에 왔다. 부정적이고 저항하는 힘이 아닌 삶이라는 굴레를 이어가야 하는 용기를 동생에게 선물하고 싶은 생존자의 언니였다. 울산에서 온 스무살 여대생은 "어머니가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지 못해 은씨의 책도 못 읽게 했다"며 괴로워하면서도 보고 싶던 은씨를 만나고 힘이 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이 시간이 좋았다. 은씨는 다른 '생존자'들이 자신을 멘토처럼 생각하는 것을 꺼렸지만, 이들에 대한 애정과 응원의 마음은 숨기지 않았다.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배우고 갑니다

"치유가 인생의 목적은 아닙니다. 상처 때문에 힘들어도 치유를 목표로 삼지 말고 나는 인생을 왜 살까 집중해가며 살아요. 나만큼 불쌍한 저 사람의 손을 잡으려면 자기 연민이라는 함정에서 나와야 해요.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그 마음이 바뀌고 나니 '남의 인생에 조연이 돼보기'가 목표가 됐어요. 우리 같이 힘내요." 은씨를 바라보는 사람들 눈빛에 온기가 느껴졌다.

"성폭력을 당한 기억으로 힘들고 아파하는 친구가 지쳐 쓰러져 있을 때 가만히 곁에 있어주기만 해도 좋겠다. 친구가 울면 같이 울어줘도 좋겠지만, 눈물이 잘 나오지 않아 어렵다면 그냥 예쁜 손수건 한 장 들고 옆에 조용히 앉아 있어보자. 힘든 시간을 보내는 친구 곁에서 당신이 언제나 거기 있는 나무 같은 친구가 돼주기를 바란다."(<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75쪽)

"성폭력을 바라보는 시선을 좀 바꿔서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에 관해 좀더 쉽게 말하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키우는 성교육을 하는 것. 아이들과 여성들이 혼날까 두렵거나 부끄러워 말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자신이 겪어내고 극복한 일을 영웅담처럼 시원시원하게 말할 수 있는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 진짜 예방 주사가 되지 않을까?"(같은 책 126쪽)

콘서트가 끝난 뒤 한마음씨가 은씨의 책에 사인을 받기 위해 기다리며 말했다. "책으로만 보던 언니가 궁금해서 왔어요.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이 공감했고, 위로가 됐어요." 서울 홍대 앞 거리에서 만나는 여느 20대와 다르지 않은 옷차림을 한 한마음씨의 얼굴이 조금은 편안해 보였다.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지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은 행사가 끝난 뒤에도 한참을 그곳에 머물렀다. 꼭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로의 상처를 공감하고 치유할 수 있다는 듯이.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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