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천덕꾸러기 '한식', 밖에서도 대접 못 받는다

노진섭 기자 2013. 4. 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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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학 교수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말에 귀를 의심했다. 최고급 호텔들이 양식·중식·일식 만찬 예약을 받으면서 한식은 준비할 수 없다고 답해왔기 때문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A 교수는 오는 6월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는 국제 학술대회에 참석하는 외국 학자 700명과 내국인 800명을 위한 만찬을 준비하기 위해 호텔들에 문의했다. 전체 참가자의 절반이 외국인이어서 한식으로 접대하고 싶었지만, 몇몇 호텔로부터 들은 대답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인건비가 비싸다는 이유에서다. 한식 만찬을 거부했던 인터컨티넨탈호텔 관계자는 "한식은 손이 많이 가고 반찬 가짓수가 많아 200명분 이상의 만찬을 준비하기는 어렵다"며 "양식보다 한식 준비에 2.5배가량 인건비가 더 든다"고 밝혔다.

A 교수는 강연 중간에 먹을 간식을 마련하기 위해 또 다른 호텔에 문의했다. 그는 "김밥을 주문하려고 했지만 샌드위치만 된다는 말을 들었다"며 "한 사람당 10만원이 넘는 만찬이나 1만원이 넘는 간식을 한식으로 준비할 수 없다는 것은 돈 문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 음식을 푸대접하는 행태"라고 비판했다. 외국인이 한국에서 한국 음식을 접할 기회를 우리가 빼앗는 꼴이다. 때문에 국내에서조차 대우받지 못하는 한식이 외국에서 인정받을 리 없다는 지적이 관련 학계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에서 대접받는 가수나 배우가 외국에서도 인기를 끌며 한류의 주역이 되는 것처럼, 한식도 국내에서 먼저 인정받아야 외국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권훈정 서울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나는 외국에서 열리는 국제 학술대회에 참석할 때마다 그 나라 음식을 대접받았다. 그런데 외국인이 먹고 자는 호텔에서조차 한식 대신 스테이크를 내놓는 우리 현실은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 같다"고 말했다. 또 "한식 세계화 사업은 홍보에만 신경 쓰느라 한식에 대한 한국인의 자부심을 세우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11월 서울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열린 한식 세계화 캠페인에서 외국인 학생들이 한식을 맛보고 있다. ⓒ 연합뉴스

특혜·자금 유용으로 얼룩진 '한식 세계화'

한식 세계화 사업은 이명박 정부가 2009년 시작했다. 영부인 김윤옥 여사가 민관 합동 기구인 한식세계화추진단 명예회장을 맡을 정도로 애착을 보였다. 한식재단(이사장 양일선)을 만들어 2017년까지 한식을 '세계 5대 음식'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4년이 지난 지금 이 사업은 사실상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원인은 다양하지만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 한식을 대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예컨대 한국을 찾은 외국인이 머무르는 고급호텔 가운데 한식당이 있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한국관광호텔업협회에 따르면 2011년 말 현재 전국에 있는 1등급 이상 호텔 311곳 중 한식당이 있는 곳은 130여 개로 전체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특1등급 호텔 상황은 더 심각하다. 서울에 있는 특1등급 호텔 21곳 가운데 한식당을 운영하는 호텔은 롯데, 워커힐 등 네 곳에 불과하다. 한식당이 있어도 대규모 연회를 한식으로 준비하는 호텔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식 세계화 사업이 이 분야 연구 지원과 인력 양성에 보탬이 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연구 성과를 빨리 내놓으라"는 정부의 압박이 가해졌던 사실이 < 시사저널 > 취재 과정에서 드러났다. 한 연구팀 교수는 "몇 년 걸릴 연구에 대해 1~2년 만에 성과를 내놓으라는 압력이 대단했다"며 "(한식 세계화 사업으로) 많은 한식 조리사를 양성했지만 이들이 외국에 취업했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연구 방향이나 예산 중복 지원 문제도 있다.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회 소속 김영록 의원은 "연구비가 지원된 분야는 고려인삼의 알코올 중독 완화, 천일염의 생리 활성 규명 등이다"라며 "이는 식품개발연구원 등이 오래전부터 연구해온 분야인 데다 이런 식품 우수성에 대한 연구는 한식 세계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또 "김이 외국에서 블랙 페이퍼(검은 종이)로 불리는 것을 바로잡지 않고 김밥을 세계적인 음식으로 만들려고 하니 성과가 나겠느냐"며 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민간 업계의 협조를 얻는 것도 부족했다. 이 사업의 실무를 맡은 한식재단은 2011년 미국 뉴욕에 한식당을 내기로 했다. 그 식당의 효과가 좋으면 세계 주요 도시에 고급 한식당을 세워 한식 세계화를 선도한다는 취지에서였다. 그러나 100억원을 투자할 업체가 1년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아 결국 백지화됐다.

미슐랭 별점 받은 한식당과 한식 사업은 별개

정부가 꼽는 이 사업의 성과는 무엇일까. 이를 취재하기 위해 한식재단에 인터뷰 등을 요청했으나 재단측은 응하지 않았다. 농림수산식품부(농식품부)가 내세운 성과는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레스토랑 평가서인 < 미슐랭 가이드 > 가 주는 별점을 받은 한식당이 생겼다는 점이다. < 미슐랭 가이드 > 는 프랑스의 타이어 제조회사인 미슐랭(영어로 미쉐린)이 100여 년 동안 발간해온 식당 안내 책자로 우수 식당에 별점을 매긴다. 미슐랭 별점을 받은 한식당은 미국 뉴욕에 두 곳, 일본 도쿄에 세 곳이다. 그러나 정부의 직접적인 노력의 결과로 보기는 어렵다. 김재민 농식품부 한식세계화사업 총괄 사무관은 "그 식당들의 노력으로 별점을 받았고, 정부가 직접적인 도움을 준 것은 없다"고 밝혔다. 그나마 두 곳은 부도 등의 이유로 문을 닫았다는 제보를 접했다. 농식품부는 일본 도쿄에 있는 한 곳이 영업을 중단한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홍보성 행정으로 망신을 사기도 했다. 2011년 미국 주간지 < 라이프 & 스타일 > 에 잡채와 비빔밥을 만들기 위해 뉴욕 한인 상점에서 당면과 고추장을 고르는, 1980년대 인기 배우 브룩 쉴즈의 사진이 실렸다. 정부는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그러나 정부의 의뢰를 받은 한식 홍보대행사가 모델료를 지급하고 연출한 사실이 드러났다. 농식품부는 그해 8월 국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이 행사에 3억5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7억원의 효과를 거뒀다'고 밝혔다. 국내 24개 매체를 통해 46건의 기사가 노출된 것이 홍보 효과의 산출 근거다.

농식품부에서 한식 세계화 사업을 전담하는 인력은 4명이다. 그나마 2011년 전체 직원이 바뀌면서 이전 사업 내용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은 없다. 한식재단도 자금 운용 문제로 감사원의 감사를 받고 있다. 갖가지 논란에 휘말린 마당에 2017년까지 한식을 세계 5대 음식으로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미국 뉴욕에 사는 한 교포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몇 해 전 정부가 버스에 '모바일 키친'이라는 마크를 붙이고 뉴욕의 한 공원 빈터에서 불고기버거 시식 행사를 벌였는데 모인 사람들 중에 미국인은 얼마 보이지 않고 대부분 한국 사람이었다. 한식 세계화 사업이 우리만의 잔치는 아닌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감사 받은 '한식 사업'에 돈 대주는 국회

한식 세계화 사업이 감사원의 감사를 받고 있다.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회(농식품위)는 2월26일 감사 요구안을 여야 합의로 의결해 통과시켰다. 이유는 방만한 자금 운용이다. 농식품위는 한식 세계화 사업에 4년 동안 769억원을 투입하고도 성과가 없다는 점과 예산을 국회의 동의 없이 다른 곳에 유용한 정황을 지적했다. 예를 들면 한식재단이 2011년 미국 뉴욕에 한식당을 열려다가 실패하자 관련 예산을 연구 사업 등으로 돌려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특혜성 시비나 불법 유용 논란에 휩싸인 사례는 많다. 패스트푸드점 롯데리아는 2009년 싱가포르 박람회 때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불고기버거가 한식 메뉴라는 명분에서였다. 커피전문점인 카페베네도 오곡라떼가 한식 메뉴라는 이유로 지원을 받았다. 롯데리아·카페베네 등 7개 업체가 참여한 해외 박람회에 정부가 사용한 자금은 2억6000만원이다.

연 2억원이던 한식 포털 사이트 운영비가 2011년에는 11억원 이상으로 크게 불어났다. 농식품부는 서버 증설용이라고 해명했지만, 37개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한 대학병원이 홈페이지를 대대적으로 바꾸고 서버를 늘리는 데 사용한 돈 5억원과 비교해도 차이가 크다.

수억 원을 주고 일부 연예인을 홍보대사로 위촉했지만 이들이 한식을 홍보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다. 또, 이명박 전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 여사가 책( < 한식이야기 > )을 내는 데 수억 원을 사용한 것을 두고 '공식 직함도 없는 영부인이 정식 절차 없이 개인 홍보를 위해 혈세를 사용한 것'이라는 비난도 있다.

이른바 '김윤옥 프로젝트'로 불린 이 사업의 올해 예산은 191억5000만원이다. 문제가 있어서 감사하기로 한 사업에 국회는 정부가 올린 예산안을 삭감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이 사업을 감사하는 대신 예산은 통과시키기로 여야가 합의한 것에 대해 국민 시선이 곱지 않다.

노진섭 기자 / no@sisa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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