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소몰이 창법보다 강렬한 버킨의 미묘한 속삭임
[동아일보]
대학 후배 M은 프랑스어에 대해서만은 원칙주의자다.
현행 외래어표기법은 프랑스어 발음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시인 랭보(Arthur Rimbaud·1854∼1891)를 '행보'라 일컫는다. 주위에서 말려도 소용없었다. '삶의 행보'만 연상되면 다행. M이 '행보' '행보'할 때마다 자꾸 군 복무 시절 접했던 행보관(행정보급관의 준말)님들이 떠올랐다. 산전수전 다 겪고 군 계급 체제마저 뛰어넘은 듯한 그들 특유의 푸근함이 시인의 이미지와 '강제 결합'돼 익살스러워졌다.
지난 토요일, 서울 능동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영국 출신 프랑스 가수 겸 배우 제인 버킨(67·사진)의 공연을 봤다. 1970년대 그와 연인이었던 프랑스의 전설적인 음악인 세르주 갱스부르(1928∼1991) 헌정 투어의 마지막 공연. 지난해에도 같은 공연을 봤지만 또 갔다.
'디 두 다' '몬 아무르 배제' '아 멜로디' '베이비 얼론 인 바빌론' 같은 아름다운 곡들을 부르는 버킨의 목소리, 일본인 밴드의 탄탄한 연주, 조명과 소품을 활용한 아기자기한 연출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버킨은 노래를 잘하는 편은 아니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기준으로 보면 더 그렇다. 속삭이는 듯한 '공기 반 소리 반' 가창에 박진영 프로듀서는 점수를 주겠지만. 그런데 그의 노래에는 우렁찬 발성으로 잘 부르는 노래에서 느낄 수 없는 감성이 있다.
내가 버킨의 노래를 처음 들은 건 10대 때 라디오에서다. '예스터데이 예스 어 데이'란 곡이었는데 영화 '클로드 부인'(1977년)의 주제가였다. 영화는 못 봤어도 '부인이 주인공인 야한 영화'란 건 알았다. 버킨의 목소리는 열에 들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사춘기 소년이었던 나는 노래가 다 끝날 때까지 형용하기 힘든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내가 불어불문학과에 진학한 건 어쩌면 버킨과 소피 마르소, 화장품, 향수, 와인의 이름과 그 발음들 탓인지도 모른다. 어긋난 전공 선택 얘기를 시작하면 정말 할 말이 많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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