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괜찮을거야, 세상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2013. 2. 19.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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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18일 월요일 맑음. 어쩌면 괜찮을지도 몰라. 트랙 #46 Bill Fay 'The Healing Day'(2012년)

[동아일보]

41년 만의 신작 '라이프 이스 피플'을 녹음 중인 영국 가수 빌 페이.

이런! 음력으로도 새해가 일주일 넘게 지났구나. 양력 1월 1일에 야심으로 세운 신년 계획은 올해도 '실은 음력 설부터'라는 변명으로 미뤄졌다. 그 심정은 한국 땅에 살면서 미국 나이를 내세우는 심보만큼 얄팍하다.

1월 1일에 뭘 했더라. 어이쿠, 벌써 가물가물하네. 그래. 새벽같이 일어나 2013년 첫 해가 떠오르는 걸 보겠다는 다짐부터 와장창 깨졌었지. 새벽 아닌 오전 일찍 일어나 눈이 쌓인 거리를 무작정 걸었다. 커다란 헤드폰을 끼고 20분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한강변의 가톨릭 성지가 나왔다. 성당에 들어서자 중창단이 부르는 아름다운 다성 음악이 귀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햇살 가득한 야외에서 오래 감았던 눈을 반짝 뜰 때처럼 하얗고 조그마한 폭발 같은 충격이 귓전에 부서졌다.

지난주 함께 점심식사를 한 J 선배는 "배우가 연기를 안(못) 하면 배우가 아니고 가수가 노래를 안(못) 하면 가수가 아니다"라고 했지만 40년 넘게 신작을 내지 않은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빌 페이는 가수다. 그는 1960년대 말 데뷔와 함께 시적인 가사와 관조적인 목소리, 빼어난 악곡으로 밥 딜런에 대한 영국의 화답으로 지목됐다. 1971년 2집을 내놓은 뒤 저조한 음반 판매량으로 음반사와 재계약에 실패한 뒤 음악계에서 그의 이름 석 자는 사라졌다.

41년 만인 지난해 낸 신작 '라이프 이즈 피플'은 음악도, 이야기도 감동적이다. 아버지가 가진 페이의 옛 음반을 들으며 자란 젊은이가 수소문 끝에 찾아낸 페이를 어렵게 설득해 낸 앨범이다. 가늘게 떨리는 페이의 음성 위로 피아노, 밴드, 현악이 얹히는 그의 음악은 존 레넌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곡들을 밥 딜런의 막내 동생이 부르는 듯 달콤하고 쓰리다.

지난 토요일, 마돈나와 레이디 가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며 세상을 바꾸지 못한 평범한 내 삶을 자책했다. '세상에 불 한번은 질러봐야지.' 이튿날 난 세상 밖으로도 나가지 못했다. 집이 더이상 소굴화돼 가는 것을 볼 수 없어 평범한 자취생으로 돌아가 청소를 했다.

페이의 신작에 수록된 '더 힐링 데이'가 입안에서 맴돌았다. 1월 1일에 들었던 그 노래. '괜찮을 거야/치유의 날에'를 반복하는 페이의 목소리. 영어를 모르면 느끼기 힘들다는 딜런이나 브루스 스프링스틴 음악의 감동보다 살갑게 다가왔다.

어쩌면 괜찮을지도 몰라. 세상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뛰어난 가수나 배우, 기자가 아니더라도. 괜찮을 거야. 치유의 날에.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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