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고통과 청량감 교차.. 마취제 같은 목소리
[동아일보]
현대 사회의 기계성을 기계적 음향으로 고발하는 미국 밴드 나인 인치 네일스. 1992년 '브로큰(고장)'에 이어 이를 리믹스한 '픽스트(수리)' 음반을 냈다. 사진 출처 나인 인치 네일스 홈페이지 |
새해를 맞아 20년 만에 치과엘 갔다. 연말부터 단단한 걸 씹을 때마다 잇몸이 쑤시듯 아파와서다. 의사는 신경치료란 걸 받아야 하는데 아플 수도 있다고 했다.
시술대에 눕자 만감이 교차했다. 첫 단계는 스케일링. 의사는 뭔가로 이와 잇몸을 갈아댔고, 혀끝에 슬슬 피의 맛이 느껴졌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마취주사를 위한 마취란 없는 걸까. 기다란 주삿바늘이 내 소중한 잇몸을 찔러오자 비명이 절로 났다. 성토할 수도 없었다. 입을 쫙 벌린 채 바짝 곤두선 신경으로 '그'의 처분을 기다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마취조차 허명(虛名)에 가까웠다. 그가 "쪼끔… 아플 수도 있다"고 하면 상당히 아팠고, "좀 많이 아플 수도 있다"고 하면 1초 뒤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신경을 긁어내는 듯한' 고통이 아닌, '신경을 긁어내는' 바로 그 고통은 날 파블로프의 개로 만들었다. 그의 말에 따라 고통을 상상했고 다음 순간 그건 가차 없이 현실화됐다. 마루타와 남영동 대공분실이 떠올랐고 피해자들 생각에 조금 숙연해졌다. 내 치아와 잇몸은 의료도구가 닿을 때마다 나인 인치 네일스(미국의 인더스트리얼 록 밴드)를 연주하는 듯했다.
50분간의 끔찍한 '고문'은 "자, 입 헹구세요"라는 말로 끝났다. "껀난… 건…가여?" 핏물을 토해내며 바보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원하는 답을 얻어냈다.
신경 치료를 한 주 쉰 지난 주말. 행복했다. 토요일엔 홍대 앞에서 본 재즈힙합 밴드 쿠마파크의 그루브에 제대로 신났고, 일요일엔 이태원에서 본 최백호의 재즈 콘서트에 울컥했다. 즐거움이 게스트로 나온 아이유 때문만은 아니라는 게 공식적인 내 입장이다.
나인 인치 네일스의 '브로큰' 앨범(1992년)은 악몽 같은 가사와 그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고어 영화 같은 뮤직비디오로 유명하다. 수록곡 '해피니스 인 슬레이버리'의 가사는 섬뜩하다. 그건 '고통스러운 사회를 바꾸고 싶어 하지만 이면에서는 지금 이대로의 속박을 즐기는 노예'에 관한 노래다.
내 구강에도 사회가 있고, 부조리극이 있더라. 묘한 청량감이 고통과 번갈아 찾아왔으니까. 근데 이번 주말은 안 왔으면 좋겠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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