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습고교생 다쳐도 성희롱도 "참고 견뎌라"?

2013. 1. 14.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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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특성화고 현장실습 현실

기계에 손가락 끼여 "악!"실습학생의 끔찍한 산재회사도 학교도 외면했다

육중한 철제 금형이 느리게 내려왔다. 박철우(가명·19)군은 소형 크레인에 매달린 가로세로 2m 길이의 금형이 제자리에 내려앉도록 조심스럽게 손으로 위치를 조절했다. 갑자기 손가락 끝에서 '우지끈' 소리가 났다. "으악!" 왼손 검지와 중지 끝 1㎝가량이 금형을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다. 목장갑 끝으로 피가 번져나왔다. 의사는 "손가락이 터졌다"고 했다. 30여 바늘을 꿰맸다. 사고가 난 지 두 달이 지난 지금은 손톱이 뭉뚝해져 자라지 않는다. 흉터가 가로세로로 서너 줄씩 나 있다. 가운뎃손가락 끝은 골무를 낀 것처럼 감각이 없다. 박군이 사고를 당한 지난해 11월8일은 또래 학생들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보던 날이었다.

경기도의 한 특성화고 금형디자인과 3학년인 박군은 지난해 9월부터 경기도 군포시의 한 공단에 있는 금형회사에서 현장실습을 했다. 회사는 병원비만 내주고는 "후유증이 확인되면 산재 신청을 해주겠다"며 차일피일 산재 처리를 미뤘다. 박군은 회사의 한 간부가 "그 새끼 회사 안 나오려고 일부러 다친 거래지?"라고 말했다는 얘기를 함께 현장실습을 나온 같은 학교 친구에게 전해들었다. 회사의 태도에 질린 박군은 산재 인정 받기를 포기하고 12월 초 실습을 그만뒀다. 박군은 오는 3월 군대에 입대하기 위해 지원서를 냈다.

학교는 박군보다는 취업률을 더 걱정했다. 한 교사는 "산재 인정을 받으려면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한다"며 실습을 그만두지 말라고 박군에게 종용했다. 그러나 이 교사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 현행 규정상 업무 중 다친 노동자의 경우 회사에 다니든 안 다니든 사고 발생일로부터 3년 안에 산재 신청을 하면 근로복지공단이 조사해 장해급여를 준다. 지난 9일 기자가 박군을 만난 자리에서 설명을 해주자 그는 "회사를 그만두면 학교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인 취업률이 떨어지기 때문에 나에게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학교는 박군의 사고를 경기도교육청에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회사는 박군에게 아침 8시30분부터 저녁 8시30분, 때로는 밤 10시30분까지 하루 12~14시간씩 일을 시켰다. 잔업이 거의 일상화돼 있었다. 주말 하루는 특별근무를 하도록 강요했다. 박군은 잔업과 특근으로 한 달에 법정 근로시간보다 50시간을 더 일하고도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70만~90만원의 월급(실습수당)을 받았다. 회사와 박군이 서명한 표준계약서에는 주 5일, 하루 8시간 일하고 월 130만원을 받기로 돼 있다.

교육과학기술부 통계를 보면, 전국의 특성화고는 475곳(지난해 4월 기준)이며, 이들 학교에 재학중인 고3 학생은 10만7000명에 이른다. 특성화고 3학년 학생 가운데 상당수가 박군처럼 산업체에서 현장실습을 한다.

실습생들 하루 12시간 노동…여학생은 성추행 겪기도

잔업 위해 야근에 휴일 특근까지법정시간보다 주 50시간 더 일해월급은 계약서와 달리 70~90만원여학생들은 임원들이 성희롱울며 고민하다 퇴사 몰리기도

근로기준법상 청소년인 현장실습생은 본인 동의를 받더라도 하루 8시간 이상 일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1주에 2일 이상 쉬도록 명시돼 있기 때문에 주말 특근도 위법이다.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1~2월 특성화고 현장실습 학생 1980명(251개 업체)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하루에 8시간 이상 일한 학생이 38.3%나 됐다. 야간에 일한 학생은 31.9%, 휴일에 일한 학생은 29.2%로 조사됐다. 조사 대상 업체 중 31곳은 실습생 120명에게 실습수당을 규정보다 평균 13만3000원씩 총 1606만원을 적게 준 것으로 드러났다.

2011년 12월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특성화고 학생 김민재(당시 19살)군이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가 된 사건이 발생한 지 1년이 지났지만, 현장실습 학생들의 열악한 현실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지난달 14일엔 울산 앞바다에서 방파제 공사를 하던 선박이 뒤집히면서, 현장실습 중이던 특성화고 3학년 홍성대(사고 당시 18살)군이 숨졌다. 울산고용노동지청은 홍군에게 초과근무와 야간근무를 시킨 혐의(근로기준법 위반)로 홍군이 일하던 ㅅ건설을 조사하고 있다. 기아차 광주공장의 김군도 주말 특근과 2교대 야간근무에 투입돼 일한 것으로 드러난 바 있다.

현장실습 학생들의 몸을 위협하는 건 기계만이 아니다. 인천의 한 특성화고 3학년 ㄱ(19)양은 지난해 10월 한 회사에서 현장실습을 하다 남자 임원으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 이 임원은 교육 중에 ㄱ양의 무릎에 손을 얹거나, 차를 타고 이동할 때 어깨에 손을 둘렀다. 놀란 ㄱ양은 혼자 울며 고민하다가 학교의 취업 담당 교사에게 얘기했고, 결국 교사가 대신 회사를 찾아가 ㄱ양의 퇴사 절차를 밟았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실업교육위원회가 지난해 1월 104명의 특성화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4명이 '성희롱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36명은 '성희롱 예방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고 답했다. 하인호 전교조 실업교육위원회 부위원장은 "성희롱 사건이 발생하면 교사들이 업체에 항의하지 못하고 오히려 학생에게 '참고 견디라'고 하는 경우가 많고, '실습을 중단하고 돌아오면 다른 업체로 현장실습을 보낼 때 순위를 제일 뒤로 돌리겠다'는 협박성 발언을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3년간 배운 전공 분야와 관련 없는 업체로 현장실습을 나가는 경우도 많다. 서울의 한 공업계열 특성화고 자동차정비과 3학년 김원익(가명·19)군은 지난해 11월 경기도의 한 파이프 생산 공장으로 현장실습을 나갔다. "친구들은 9월부터 실습을 나가는데 자동차 쪽으로는 일거리가 잘 안 들어오더라고요." 김군이 하는 일은 주로 단순 작업이다. 파이프 수를 세거나 파이프를 기계에 넣었다가 빼는 작업, 화학약품으로 파이프 안을 닦는 일을 한다. 전교조 실업교육위원회의 지난해 1월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현장실습 업무와 전공이 관련이 없다'고 답한 학생이 38.5%나 됐다.

서울시교육청이 지난해 9월부터 12월까지 '교육청 지원형 특성화고 사업' 참여 학교 7곳을 대상으로 벌인 감사에서도 현장실습 관리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한겨레>가 유기홍 민주통합당 의원을 통해 입수한 서울시교육청의 '2012년 특성화고 운영 실태 정책감사 결과 보고서'를 보면, ㄱ고교의 경우 지난해 현장실습을 나간 학생 63명 중 교사가 사업체로 직접 찾아가 실습 상황을 점검한 학생은 17명뿐인 것으로 조사됐다. 나머지 46명에겐 전화통화로 현장지도를 대신했다. 이 학교는 2011년엔 학생 133명 중 25명에게만 현장지도를 했다. ㅅ고교는 학생들이 현장실습을 나간 업체 41곳 중 12곳에서는 현장지도를 하지 않았고, 현장지도를 나간 사업체에 대해서도 관련 일지를 기록하지 않아 지적을 받았다.

시교육청 감사관실은 "현장지도의 목적은 교사가 산업체를 방문해 학생의 근무조건, 임금, 건강 상태를 직접 점검하는 데 있기 때문에 반드시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제2의 기아자동차 현장실습생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현장지도에 대한 교원의 책무성을 강화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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