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매매특별법 위헌 제청]"내 노동력 파는 엄연한 노동.. 이 일도 못하면 당장 노숙자"

곽희양 기자 2013. 1. 13.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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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헌심판 신청한 김정미씨

성매매특별법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한 김정미씨(42·여·사진)는 사진기자 앞에서 선글라스를 벗지 못한 것을 내내 아쉬워했다. 그는 13일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집창촌 '청량리 588'에서 이뤄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도둑·강도짓을 한 것도 아닌데 얼굴을 가려야 하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며 "성매매도 노동력을 팔아 밥을 먹고 사는 하나의 직업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월남전 상이용사였던 김씨의 아버지는 그가 20살 때 급성백혈병으로, 어머니는 그보다 앞서 그가 18살 때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남3녀 중 막내였던 김씨는 가정형편 때문에 고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20살부터 미용실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21살 때 뺑소니 교통사고로 오른쪽 다리와 팔을 다쳐 일을 그만뒀다.

이후 경기 광주와 성남 일대의 식당, 카페 등에서 일을 했다. 하지만 몸이 성치 못해 하루 일하면 2~3일은 쉬어야 했다. 김씨는 "당시 하루 일당으로 4만원 받아 여관비 1만원, 밥값, 병원비 등을 내면 남는 게 없었다"며 "차라리 엄마, 아빠 곁으로 가는 게 낫겠다 싶어 여관방에서 손목을 긋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28살이 되던 해 그는 스스로 성매매 알선 여성을 찾아갔다. 밥 한 끼 먹는 것조차 녹록지 못해서였다. 김씨는 경기 광주·성남 일대의 성매매 업소에서 6년간 일한 뒤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되기 두 달 전인 2004년 7월 청량리로 왔다. 하지만 성매매특별법은 수입을 3분의 1로 줄여놓았고, 그는 지금까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씨는 성매매를 시작하고 나서 다른 직업을 찾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몸도 성치 않은 데다 다른 직업훈련을 받는다 해서 취업이 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일을 그만둘 순 없다"고 털어놨다.

"(성을 파는 것이) 가장 밑바닥 일이지만 엄연한 직업"이라는 김씨는 "많은 성매매 여성들이 생활비나 아이 교육비를 벌려고, 그저 밥 한 숟갈 먹으려고 이 일을 하지만 당장 일을 못하게 되면 노숙자가 되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 곽희양 기자 huiyang@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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