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영, '26년'과 '남영동 1985'를 관통하는 선악(善惡)(인터뷰)

김지혜 기자 2012. 12. 10.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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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E!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단순히 연륜의 상징만은 아닌 것 같다. 배우 이경영의 은빛 머리에는 그가 지난 10년간 헤쳐 온 인생의 다사다난한 기록이 묻어있는 듯 했다. 10여 년 전 불미스러운 일로 연기활동을 중단했던 이경영은 인생에서 다시 겪고 싶지 않은 힘겨운 시간들을 거쳐 본업인 연기자로 돌아왔다.

배우 이경영은 여전했다. 충무로를 떠나있었던 지난 10년간 머리가 많이 희었다는 그는 "삼천갑자처럼 오래 살고 싶다거나 젊은 날로 돌아가고픈 마음은 없다. 지금 이 상태가 좋다"고 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의 너스레와 달리 특유의 촉촉한 눈빛은 20대의 어린 배우처럼 살아있었고, 중저음의 목소리는 한층 더 깊어졌다.

그의 복귀가 낯설기보다 반가운 것은 지난 공백이 무색하리 만큼 보다 농익은 연기력을 스크린에서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2012년 겨울, 그는 '남영동 1985'와 '26년'이라는 문제적 영화를 연이어 내놓았다. 흥미로운 것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어두운 단면을 다룬 두 편의 작품에서 이경영은 상반된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점이다.

'남영동 1985'에서는 고문기술자 '이두한' 역을 맡아 피도 눈물도 없는 희대의 악마로 변신했다. 반면 ''26년'에서는 젊은 날 5.18이라는 폭압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가피하게 지은 죄를 회개하기 위해 단죄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노인 '김갑세'로 분했다.

"본의 아니게 연이어 사회파 영화라 불릴 만한 소재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사회적 메시지 때문에 선택한 것이 아니라 때마침 나에게 그 작품들이 온 것이다. 좌나 우, 진보와 보수 등 이분법적 시선으로 영화를 보지 말고, 폭넓은 시각으로 봐주셨으면 좋겠다. 대중문화 예술이 건강하게 자리 잡아야 사회도 감기에 덜 걸릴 것이다. 또 배우인 나도 그런 시선에서 자유롭고 싶다"

두 편의 영화에서 이경영이 차지하는 무게감은 상당하다. 특히 '남영동 1985'에서 선보이는 정제된 카리스마는 영화 전반을 지배하며 관객들에게 숨 막히는 공포감을 선사한다. 말끔하게 수트를 차려입고 왼쪽 손에 브리프 케이스를 들고 남영동 대공분실 515호를 들어서는 그의 모습은 마치 지적인 구원자의 모습과 같다. 반복된 고문에 지친 김종태(박원상 분) 역시 그를 메시아로 여겨 그곳에서 받은 고문의 참상을 알린다. 그러나 김종태도 관객도 이내 그것이 악몽의 시작임을 알게 된다.

그는 실존 인물 이근한의 분신이 된 것 마냥, 희대의 고문관을 연기해보였다. 외상없이 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파괴시키는 고문 방법만을 구사하며 김종태를 서서히 죽여 갔다. 이경영은 이두한을 연기함에 있어 시종일관 담담하고 침착했다. 그가 선택한 그 정제된 연기법은 마치 관객들을 515호실에 몰아놓고 고문하는 듯한 공포를 안기기에 충분했다.

"영화를 보면서 "나도 내가 저 연기를 했었나" 싶은 순간들이 많았다. 내안의 또 다른 누군가가 스크린에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김종태를 연기한 박원상, 명계남, 문성근 등 가해자 역과 피해자 역을 한 모든 사람들을 망라해 집단 체면에 걸린 것 같았다. 고문실안에서 연기한 우리들은 그 공간, 그 순간이 현실인 것 마냥 연기했다. 때문에 배우들 간에 주고받는 리액팅같은 화학작용이 필요치 않았다. 자기 역할만 충분히 했을 뿐인데 그런 앙상블이 나온 것이다"

이경영은 이근안을 모태도 만들어진 이두한을 연기하면서 실존 인물에 대한 자료를 전혀 보지 않았다. 그는 "감독님이 실명을 쓰지 않은 이유는 비단 이근안이라는 한 인물뿐 아니라 야만의 시대를 산 야만인에 대한 보편적 캐릭터를 그리고 싶었으리라 생각했다"면서 "이두한에 대한 이야기는 시나리오에 모두 표현돼있었다. 시나리오만 잘 따라가면 감독님의 의도를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악마를 연기한 이경영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객들과 첫 시사회를 가진 날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스크린 밖에서 본 영화 속 현실이 너무나 끔찍하고 마음 아팠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끔찍한 시대의 잔상이 아직도 이 사회에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느꼈다고 했다.

"이정희 후보가 "고문은 사람은 살려놓고,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영화를 보고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용납되어선 안 되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리고 아픈 야만의 시대는 온전히 끝난 것만은 아니라는 것,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게 되는 세상이라는 것이 마음 아팠다"

이경영은 이근안이 이 영화를 보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는 "영화를 보면서 "난 저렇게 고문하지 않았어"라고 항변해도 된다. 다만 이 영화가 그의 마음 깊은 곳의 미안함을 건드릴 수만 있다면, 그래서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용서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길 수만 있다면 이 작품은 가치가 높아질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에 대한 문제는 어려운 영역이라도 말했다. 영화 역시 '용서'라는 화두에 대해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후반부 국회의원이 된 김종태가 투옥중인 이두한을 찾는 장면은 관객들로 하여금 '용서'의 참의미를 생각을 하게 한다. 김종태를 내려다보며 갖은 고문을 행하던 이근안은 세월이 흘러 무릎을 끊고 김종태에게 용서를 구한다. 이 장면을 연기한 이경영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감독님에게 "과연, 이두한의 용서는 진심일까요?"라고 물었다. 감독님께서 "그 순간만큼은 진심 아니였겠니?"라고 하시더라. 그러나 나는 진심인 것 같기도 하고, 거짓인것 같기도 한 다소 모호한 연기를 했다. 이근안에 대한 정보를 처음부터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장면의 액팅을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장면에 대한 판단은 오롯이 관객의 몫이다"

이경영은 '26'년에서는 '남영동 1985'와는 정반대의 정서로 연기에 임했다. 5.18 당시 계엄군으로 시민을 쏜 뒤 평생을 죄책감 속에 살다 뒤늦게 '그 사람'에 대한 복수를 계획하는 '김갑세'로 분했다. 그는 '26년' 속 캐릭터 연기에 대해 "김갑세는 죄의식과 트리우마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왜 젊은 시절의 아픔을 늙어서까지 가져갈 수밖에 없는지를 설득력 있게 그리는 데 중점을 뒀다"고 말했다.

'26년'의 시사회에서 이경영이 영화를 본 뒤 남긴 첫 말은 "미안합니다"였다. 그는 당시 "영화 속에서라도 '그 사람'의 사죄를 받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관객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남영동 1985'와 '26년'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이경영은 동일하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영화 속에서 맡은 인물은 단편적으로 보자면 악과 선으로 확연히 나눠질 수 있지만, 두 작품 속 캐릭터를 통해 관객에게 전하고픈 메시지는 똑같았던 셈이다.

결국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이에게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창구는 연기다. 10년을 쉬며 힘겹게 돌아온 길이지만, 이경영은 이제부턴 가열차게 연기할 것이다. 그것이 지난 날에 대한 보상인 동시에, 대중들에게 선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 될 것임을 알기에.

"이제는 성숙하고 싶다. 지난 날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줬던 영화의 숲에서 잘 지내고 싶다. 예전엔 이곳을 떠나도 다른 숲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다른 숲은 없더라."

ebada@sbs.co.kr

< 사진 = 김현철 기자khc21@sb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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