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박원상 "물고문 받는 시늉만으로도 죽을 듯 힘들었는데"

한국아이닷컴 모신정 기자 2012. 11. 21.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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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의장 등 실제 피해자 고통 어땠을지 상상만해도 몸서리쳐져"'남영동1985'서 고문 피해자 김종태 역

'부러진 화살'에서 인권 변호사 역을 통해 안성기와 찰진 호흡을 선보였던 박원상이 문제작 '남영동1985'로 돌아왔다.

박원상은 22일 동안의 이근안 등 고문 수사관들의 모진 고문으로 인해 인간으로서 마지막 자존심까지 뿌리째 짓밟힌 채 생사의 갈림길을 오갔던 고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의 일화를 토대로 한 영화 '남영동1985'에서 김종태 역을 맡아 물고문, 고춧가루 고문부터 전기고문 등 처절한 고문 피해자의 모습을 연기했다.

개봉을 앞두고 홍보 인터뷰에 나선 박원상을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짙은 어두움이 깃든 저녁 무렵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박원상의 촉촉한 눈빛과 여읜 낯빛을 보고 있자니 이제 막 험한 고문 현장에서 영문도 모르고 풀려난 김종태를 대하는 것만 같아 가슴이 먹먹해 왔다.

김근태 의원이 실제 경험한 고문의 고통을 연기자인 그가 100% 체험했을 리야 만무하지만 해당 배역을 맡기까지의 고민과 또 총 25회 차의 촬영 기간 동안 실제 김근태가 되기 위해 수백 번도 더 감정 이입을 하며 입으로 코로 쏟아지는 물줄기를 수백차례 감내해냈을 시간들을 생각하니 한동안 침묵 속에서 준비해온 질문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박원상은 "저도 참 막막하다. 어디서부터 어떤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촬영현장의 기억들이 전부 포맷됐다. 아마 한 촬영이 완성되면 마치 본능적 방어기재처럼 고문 장면의 기억을 하나씩 삭제했던 것 같다"며 "이번 인터뷰를 위해 조각모음처럼 기억을 끌어 모으고 있다. 너무 기억이 안 나서 함께 출연한 김의성 형님한테 도움을 요청해 몇 장짜리 이메일을 받았다"고 했다.

- 정지영 감독에게 출연 제안을 받고 바로 수락했나.

▲ 사실 제가 연기를 하면서도 정지영 감독 영화를 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너무 멀리 계신 분이었는데 '부러진 화살'의 박 변호사 역이 제게 와서 정지영 감독도 만나고 '하얀 전쟁'으로 그렇게 팬이었던 이경영 선배도 만나게 됐다. 안성기 선배와는 '화려한 휴가' 때 이미 한 번 호흡을 맞춘 적이 있었다. '부러진 화살'을 너무 힘들게 찍었는데 관객들의 응원이 커서 힘이 되던 어느 날 정 감독님께서 '이번 식구들 그대로 한 편 더 가자'고 하시더라. 그러면서 고문 영화를 해보고 싶다 시며 김근태 역을 제안해 주셨다. 그 때 느낌이 어마어마했다. 그 때 제가 정 감독님 손을 덥석 잡았다. 그 길로 바로 서점에 가서 '남영동' 책을 사 읽었다.

- 상영 시간 내내 고문을 당하는 역할을 감당할 자신이 있었나.

▲ 그 때 제가 가진 고민은 고문 장면을 어떻게 세세하게 묘사하는가 하는 부분이 아니었다. 김근태 상임고문에 대해 개인적으로 잘 모르지만 그 분은 자기 한 인생을 신념을 위해 모든 고통을 올 곳이 감당하며 버텨낸 분이다. 그저 배우로서만 살아온 43살의 박원상이 민주화 운동에 온 인생을 바친 분의 삶을 연기해도 되는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 머릿속에 내내 떠올랐다. 물론 살인범 연기를 하기 위해 살인의 경험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제가 민주투사가 아니고 대학 다닐 때 돌멩이 한 번 던져본 적 없다고 해서 이 역할을 할 수 없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 일종의 강박증 아닌가.

▲ 영화에서 직시하는 1985년도 언저리를 외면하며 흘러온 한 사람으로서 부채 의식이 들었다. 88년도 신입생 시절 한창 연극을 하고 있을 때 학교(숭실대학교)에서 박래전 선배가 분신으로 투신해 돌아가신 일이 있다. 그 당시 저는 연극을 하고 있었다. 총학생회에서 공연을 중단해달라고 했지만 묵념만 드리고 공연을 했던 기억이 있다. 연극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사회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살아왔는데 내가 과연 김종태가 20년의 세월이 흘러 복지부장관이 되는 모습을 연기할 수 있을지 도저히 그려지지 않더라. 그래서 이경영 선배가 맡은 이두한 역과 바꾸자고도 제안 했었다. 결국 이경영 선배가 '원상아, 네가 언제 이런 역을 감당해 보겠냐'고 혼을 내셔서 정신을 차렸다.

- 어릴 적 물에 빠지는 사고로 트라우마도 있었다던데 물고문 장면 어떻게 버텼나.

▲ 사실 촬영할 때는 어금니 꽉 깨물고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첫 촬영 때 칠성판에 몸이 눕혀지고 눈이 가려지고 코와 입에 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니 온 몸이 경직되더라. 결박이 되는 순간 막막해져왔다.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 나를 공포로 몰아넣더라. 어릴 적 트라우마가 바로 찾아왔다. 첫 촬영이 끝나고 호흡도 못하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촬영 현장이 패닉에 빠졌다. 모두가 당황했다. 연극만 20년이 넘게 했는데 호흡법과 발성, 신체 훈련을 누구보다 열심히 해왔는데 이런 패닉에 빠져 몸이 안 따라주니 미치겠더라.

- 그런데 어떻게 극복했나.

▲ 총 15회차의 짧은 촬영 일정이 예정돼 있었고 내가 못하면 이 영화는 바로 촬영 종료이기에 정신을 차려야 했다. 사실 정지영 감독님이나 고문 수사관 역의 다른 배우들과 이미 약속이 돼 있었다. 내가 참을 만큼 참다가 내가 컷을 직접 하기로 했다. 묶여 있어서 손, 발을 못 쓰기에 몸부림을 치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는 다른 배우들이 이 신호를 전혀 감지 못하더라. 김의성 선배는 그 순간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기도 했다. 이런 순간은 두렵기도 했다. 결국 스크립터가 초시계로 시간을 쟀고 점점 물고문 장면의 시간을 25초에서 30초, 또 40초로 시간을 늘려 갔다. 영화 속 고문 장면은 촬영을 할수록 점점 적응되고 익숙해져 갔지만 현실 속 고문은 당할수록 더 고통스럽고 처참하지 않았겠나. 연기로 시늉만 하는 것도 죽을 것처럼 힘들었는데 실제로 겪은 분들은 어땠을까. 그 생각을 하니 더 힘들었다.

- 전체 영화분량 중 가장 힘들었던 장면은.

▲ 김종태가 전기고문을 받다가 함세웅, 권오경의 이름을 대며 거짓 증언을 하고 내 분신 앞에서 나의 나약함에 대해 토로하는 장면을 찍을 때 정말 고통스러웠다. 눈물 연기가 어려운 게 아니라 연기를 할 때는 보통 커트별로 나눠 찍기에 감정을 안배해야 하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 장면을 찍을 때 故김근태에 대한 부채 의식이 와르르 치밀어 오르면서 그 분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을 연기하려니 감정이 주체가 안됐다.

- 좌파들의 선동 영화라는 시각도 존재하는데.

▲ 그런 것조차도 우리가 감당할 몫이다. 다만 나라도 절반이 나눠져 있는데 자꾸 여러 파가 나뉘어 그런 주장을 하는 게 싫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분들의 블로그를 몇 개 읽어봤다. 영화라는 건 개봉이 되는 순간 관객 각자의 몫이라고 본다. 다만 그런 소모적 논란에 휘말리지 말고 고문 피해자들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 명계남, 이경영 등 돌아온 중견 연기자들의 대활약도 반갑던데.

▲ 명계남 선배는 제가 대학 극단에서 연극을 하기는 했지만 마땅히 소속될 극단이 없어서 카페 연극을 전전할 때 명계남 선배가 대학로 연극계로 저를 이끌어 줬다. 96년에 고 박광정 선배가 연출한 '비언소'에 1인 다역으로 캐스팅 됐고 그걸 계기로 차이무 단원이 될 수 있었다. 문성근 선배는 차이무 극단의 가장 맏선배님이다. 문성근 선배는 후배놈이 고생하는 것을 대놓고 감싸주셨다. 가슴이 꽉 차오르는 감사함이 있다. 명 선배는 제가 고문신 첫 촬영 때 당황할 때 '야, 인마. 감정으로 하지 말고 이성으로 해. 호흡법 기억하란 말이야'하고 호통 치며 큰 도움을 주셨다. 이경영 선배와는 정말 한 모니터 안에서 연기하는 것 만으로도 설??? 나 혼자 촬영 초반 집중한답시고 폼 잡을 때 선배들이 다 받아줬다. 정말 가슴 벅차다.

-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함께 한 류승범, 황정민과 이후 작품선택 폭이 많이 달랐다.

▲ 배우는 선택당하는 직업이다. 픽업을 해줘야 그제야 선택권이 생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끝내고 나서 나는 다시 극단으로 돌아갔었다. 그 때는 그러고 싶었다. 황정민이나 류승범은 많은 노력들을 했잖나. 농반진반으로 가늘고 길게 사는 게 내 모토라고 말하곤 하는데 남들이 인정해주는 것 보다 내가 재미있어서 하는 게 좋다. 이번 작품 이후 선택 받는 기회가 더 많아지겠지만 이 작품 전과 후 내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요즘 영화 한 편을 찍으면 1년 먹고 살 돈은 된다. 그저 아이들 키우며 쓸데없는 욕심 부리지 않고 꾸준히 작품 활동 하고 또 아이들이 크고 나면 배낭 메고 여행 다니며 살고 싶다. 관객들에게 꾸준히 신뢰 받는 연기자면 된다고 본다.

- 이천희, 우희진 등 함께 한 후배 연기자에 대해 한 말씀한다면.

▲ 이천희는 대중적 인지도도 높고 대중적 활동을 많이 한 친구인데 자발적으로 우리 영화를 하겠다고 찾아온 걸로 안다.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우희진도 마찬가지다. 한참 남고생들 책받침을 장식한 후배인데 선배 입장에서 얼마나 이들이 예뻤겠나. 김중기도 마찬가지이고 아버지뻘 선배들에게 전혀 기죽지 않고 자기 역할들을 잘해주어 기뻤다.

한국아이닷컴 모신정 기자 msj@hankooki.com사진= 한국아이닷컴 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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