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경향〉[내가 주연이다]세상에 국민엄마만 있나? 배우 김혜옥
신이 너무 바빠 어머니란 존재를 지상에 내려보냈다고 하지만,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너그럽고, 푸근하고, 헌신적이며 가족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녀들보다 더 여리고, 섬세하고, 유치하고 감정기복이 심한 어머니들도 많다. 선병질적(결핵성 질환의 일종이나 일상생활에서 쓰일때는 예민하고 신경질을 잘 내는 성격을 가리킴)이고 히스테릭한 성격의 어머니, 오히려 자식들이 더 보호해줘야할 것 같은 어머니 역에는 김혜옥(55)을 따를 연기자가 드문 것 같다. 요즘 김혜옥은 30%가 넘는 시청률을 자랑하는 주말극 < 내딸 서영이 > 에서 기업 회장의 부인이자 주인공 서영의 시어머니인 차지선 역을 맡아 특유의 우아하지만 철없는 어머니상을 보여준다.
극중 차지선은 부잣집 딸로 중매로 만난 기업 회장 남편, 사랑스러운 두 아들과 함께 그림같은 집에서 산다. 집에 있을 때도 막 외출이라도 할듯 공들여 부풀려 손질한 머리모양, 프릴달린 블라우스에 플레어스커트, 고급스러운 소재의 니트 등 옷차림도 완벽하다. 가부장적 성격이지만 회장 남편 덕분에 남편 회사 간부 부인인 여고 동창에게 "남편이 회장이지 내가 회장이니? 우린 친구쟎아"라며 너그러운 우정과 관대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공부를 못해도 애교가 많은 둘째아들은 엄마와 함께 음악을 틀고 춤을 추어주기도 하고, 집에서도 성악 발성 연습을 하며 소녀시절의 꿈을 떠올린다. 공부 잘하고 잘생긴 큰아들이 고아라고 주장하는 서영이와 결혼했을 때, 그는 무식한 시어머니의 원초적 표독함이 아니라 우아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냉정한 태도로 반대를 했지만 결국 받아들였다. 여고 동칭 친구에게 며느리 흉을 볼 때도 그의 교양미는 저절로 드러난다.
"내가 엄마가 없는 그 애를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곁을 내주지 않아. 우리 며늘애가 상냥하지, 예의바르지, 얼굴 예쁘지, 거기다 머리 좋아서 판사지. 일주일에 하루는 꼭 저녁을 한단다. 그런데 얼마나 맛깔스럽게 만드는지(긴 한숨). 얘, 내가 며느리 자랑하는게 아냐. 글쎄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로 전업하겠다는구나. 누가 저더러 돈 벌어 오랬니…."
결코 보통 시어머니들의 며느리의 뒷담화도, 가까운 친구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넋두리도 아니면서 가을 햇살이 비치는 정원의 의자에 앉아 무심한듯 이야기를 하는 모습은 김혜옥이기에 더욱 감칠맛이 난다.
물론 차지선의 실체는 외롭기 그지없다. 유능한 기업가인 남편은 젊은 여자와 외도중이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큰아들은 대체 어느 유전자를 받았는지 무뚝뚝한 아버지와 대조적으로 며느리에게 다정하고 헌신적이다. 사랑스러운 둘째아들 역시 실상은 남편이 부하 여직원과 사이에 낳은 존재다.
그는 < 솔약국집 아들들 > 등 전작에서도 그런 어머니상을 보였다. 집에서도 항상 홈드레스를 갖춰 입고, 외출할 때는 영국 왕실 가족이나 쓸법한 파라솔처럼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자식을 보듬기보다 "내가 속상해" "나 아퍼"라고 투정을 부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유리그릇처럼 아름답지만 언제 깨질지 모르는 불안한 영혼, 화려한 외피 속에 숨막히는 외로움을 삭이는 중년 여성, 어머니이고 아내이지만 소녀의 원형질을 잃지 않는 어머니를 김혜옥은 특유의 표정, 약간 떨리는 목소리 등으로 조증과 울증을 오가며 완벽하게 표현해낸다.
김선아와 함께 출연한 < 여인의 향기 > 에서도 그는 철부지 엄마였다. 딸이 가져다 준 돈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사입고, 암에 걸린 후 일본 여행을 다녀온 딸에게 "잘 다녀왔니? 몸은 괜찮고?"라는 안부나 걱정보다는 "왜 내 선물은 안사왔냐"고 투정을 부린다. < 로얄패밀리 > 에서도 그는 소녀같은, 과거를 상실한 어머니였다. 김혜옥 자신은 그동안 극중에서 자신이 보여준 어머니상을 '모자라고 푼수같고 변태같은 엄마'라고 표현한다.
김혜옥은 모성 연기의 '이단아'로 불린다.'자아 강한 엄마''주책 맞은 엄마''성격 있는 엄마' 등 보통 엄마와 다른 캐릭터를 연기해 왔다. 방송작가 박혜련씨는 "헌신적이고 푸근한 어머니상은 누구나 쉽게 그릴 수 있지만 중년의 히스테릭함과 자신의 애증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어머니 모습은 미세한 표정, 호흡의 강약 등 디테일이 요구되는 연기"라면서 "김혜옥씨는 그만이 해석과 소화가 가능한 연기로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자신의 연기 비결을 '순탄치 못한 지나간 삶들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어린 시절의 가난함, 우연히 들어선 연극 무대, 연출가였던 남편과의 사별…. 연극에선 주연이었지만 30대 초반에 처음 텔레비젼에 출연해서 맡은 역은 베스트셀러 극장의 과부 역이었다. 그후 < 전원일기 > 의 서울댁으로 고정 배역을 맡아서도 20년 가까이 빨래만 했다. 마음과 달리 흘러가는 일상, 곳곳에 터지는 파편들과 감춰진 암초 덕분에 그는 내상을 많이 입었고 그 상처들이 연기로 표현되었다.
그가 시청자들에게 각인된 것은 시트콤 < 올드미스 다이어리 > 덕분이다. 당시 40대였지만 김영옥·한영숙 등과 함께 할머니 3총사 중 환갑인 막내할머니 역을 맡았다. 여고시절 이후로 정신연령이 멈춰버려 할머니이기를 거부하는 만년 사춘기 소녀같은 캐릭터로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했다. 밖에 나가서도 아줌마라 불려지는 걸 좋아하고 조카와 매일 싸우고, 문자와 인터넷 사용, 운전면허도 있어 언니들을 무시하며 젊은척 하는데 노인이 되면서 오는 신체적 변화를 겪으며 당혹해하는 귀여운 할머니 역으로 어린팬들도 확보했다.
영화 < 육혈포 강도 > 에서도 3인조 할머니 강도단으로 맹활약했다. 주위에선 '얼마든지 나중에도 할 수 있는 역할을 지금 가장 좋은 시기에 앞서서 하냐. 배우는 이미지가 중요한데' 라며 하지말라시던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작품이 좋고, 그 역할에서 자신이 보이는 배역이면 할머니건, 악인이건 전 가리지 않는다.
"저는 < 전원일기 > 에서 '서울댁'만 20년 가까이 했어요. 배우에게 나이란 큰 의미가 없어요. 나이 먹으면 자연스럽고 좋지요. 경험이 축적된 만큼 연기의 폭이 얼마나 넓어지는데요. 자기가 경험했던 일 중 비슷한 부분을 극대화해서 표현하는 거죠. 완전히 똑같은 상황은 아니겠지만 과거의 기억속에는 비슷한 장면들이 다 축적돼 있잖아요. 그런 걸 잘 끄집어 내서 활용하는 겁니다. 연기할 때 일부러 어떻게 해야지 하는 적은 별로 없어요. 50여년을 살아와서 이제는 어떤 느낌이든 거의 다 경험해 봤다고 할 수 있죠."
불교신자로 불교방송에서 DJ도 맡고 있는 그는 연륜과 경험의 축적만큼 '비움'을 강조한다. 항상 감정을 잘 비우고, 한번 지나간 드라마는 기가 막히게 잘 잊어버린단다. 덕분에 우리는 그가 만든 색다른 어머니, 수많은 인생을 배운다.
< 유인경 선임기자 >모바일 경향 [경향 뉴스진(News Zine) 출시!]| 공식 SNS 계정 [트위터][미투데이][페이스북]- ⓒ 스포츠경향 & 경향닷컴(http://sports.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경향닷컴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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