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명이 추천한 파워 클래식] 스물다섯 번째 작품은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

2012. 9. 24. 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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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이 읽은 '토니오 크뢰거' 토니오와 싸워 百戰百敗.. 그의 바른말이 밉다

간만에 이 책을 꺼냈습니다. 닳아 없어질 정도로 책장에 침을 발라 읽고 또 읽는 게 고전이라는데 글쎄요, 제게는 주석으로 된 추라도 잔뜩 매달린 양, 어쩌다 한번 묵직한 마음일 때 꼭 집어 드는 게 요놈이지 뭡니까. 습관처럼 책을 다 읽으면 기억나는 얼마간을 면지(面紙)에 적어두던 나였기에, 그 책 표지 안쪽에 휘갈겼던 구절을 따라 읽어봅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건강하고 힘찬 감정은 몰취미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술가가 인간이 되고 느끼기 시작하면 그는 끝장입니다. 1998년 12월 24일."

스물세 살의 크리스마스 이브. 한참 예쁠 나이에, 한창 따뜻한 설렘으로 바쁠 계절에 그래요, 나는 좀 아팠던 게 분명합니다. 군데군데 책장 속에 생뚱맞게 던져져 있던 몇 개의 단어들. 예컨대 손과 촛불과 목도리와 연근과 한자로 쓴 시(詩)와 썼다 지운 흔적이 역력한 흐릿한 사랑이라는 두 글자가 증거로 그리 남았으니 말입니다.

모두가 마른오징어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몸 포갤 수밖에 없는 출근 시간의 1호선 열차에서 나는 종종 한 손에는 이 책을, 남은 한 손으로는 스위스제 접이식 칼을 쥐고 있었다지요. 누구든 한 놈만 걸려봐, 바로 찔러버릴 테니까. 사실 누가 내게 관심이나 가졌겠습니까. 몹쓸 자기애로 똘똘 뭉쳐 고슴도치처럼 뾰족뾰족하기만 했던 그때 IMF를 직격탄으로 맞은 세대였고, 토익과 토플조차 헷갈려야 할 정도로 스펙을 누구네 운동화 이름쯤으로 담쌓고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무능을 실수로 감추는 가식을 떨어야 내일의 밥벌이가 보장되는 가운데, 하고픈 것도 되고픈 것도 없이 매일 아침 물음표 하나 우산인 양 양산인 양 떠받든 채 한숨 쉬는 나였으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졸음을 참기가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자리에 앉고 싶은 욕망이 왜 그렇게 간절했을까요.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는 패배자이며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소박하면서도 가혹한 교훈"이란 문장에 밑줄 쫙 그었음에도 드라마 '아내의 유혹'의 장서희처럼 볼따구니에 점 딱 찍고 복수하지 못해 왜 그렇게 안달복달이었을까요. 딱지처럼 접은 A4지 안에 수줍게 숨겨두었던 울고 싶던 충동에 대한 기록들, 시랍시고 치밀어오르는 찌릿한 문장들을 막연히 부여잡았을 뿐이었는데 왜 그렇게 퉁퉁 부은 눈이었을까요.

살아간다는 일의 막막함, 그 깜깜한 내일의 막장을 뚫고 하얗게 세어버린 아빠의 코털에, 마를 새도 없이 멈춰버린 엄마의 폐경에 저는 이렇게 묻곤 했다지요. 당신들은 어떻게 이날 이때껏 순정한 어른으로 그리 늙을 수 있었나요. 당신들은 어떻게 눈을 뜨고 잠이 들기까지 불안하고 초조한 그 순간순간을 감쪽같이 숨길 수 있었나요. 당신들은 어떻게 나날이 죽어가면서도 매일같이 살아 있음을 감사하는 뜨거운 입맞춤을 식탁 위에 남길 수 있었나요.

그로부터 지금껏 나는, 왜 이렇게 생겨먹었을까 부모도 답해주지 못해 혼자됨에 빠질 때마다, 토니오 크뢰거씨를 만나왔습니다. 그의 생각 가운데, 그의 말 가운데 내 고해성사의 보속(補贖)이 될 만한 새김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저마다의 목적지가 분명한 듯 자신감 넘치게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누구나 하이힐 비칠거리듯 발을 헛디디려는 찰나 속에 휘청, 흔들리고 있을 우리. 보세요, 그러나 부자에 신사에 교양 넘치는 토니오 크뢰거씨 또한 평생을 갈팡질팡, '이다'와'아니다'사이를 진자처럼 규칙적으로 더불어 부지런히 오가지 않았던가요.

"비극적인 허깨비들과 우스꽝스러운 허깨비들"과 평생 싸우는 일이 삶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았다는 데서 토니오 크뢰거씨는 실로 '난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행복이란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란 걸 알면서도, 이 깨달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매일 고민하고 매일 주저하고 매일 반성하는 토니오 크뢰거씨가 꽤나 빈틈없이 보이기도 했거든요.

가끔 토니오 크뢰거씨의 '말씀'이 좀 지겹게도 들립니다. 온갖 세상 풍파에 찌든 막돼먹은 내 앞에 자나깨나 논리정연하게 바른말만 하는 고뇌 속의 사나이가 불편한 진실을 마구 늘어놓는다고 할 때, 궁지에 몰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의 입을 꽉 물어버릴 수밖에요. 정직하지 못한 데서 오는 부끄러움이 폭력으로 변모할 때의 슬픔, 그것이 얼마나 침울한지.

"난 잠이 오는데, 넌 춤을 춰야겠구나. 사랑하고 있는데 춤을 춰야 하는 이 굴욕적인 모순" 속에 우리는 또 오늘을 삽니다. 우연히 파주로 견학을 온 한 대학생이 내게 물었습니다. 책 딱 한 권만 추천해주세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토니오 크뢰거, 라 말한 나, 반기를 들었다가 백기를 들었다가 그와의 싸움에서 늘 백전백패인 나. 아무래도 이 남자, 평생 내 남자 될 모양입니다.

[140자 트윗독후감]

"시민으로서의 역할과 예술가 사이의 고뇌. 외로운 경계인이 쓴 결코 외롭지 않을 소설" (페이스북 응모자 차평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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