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라면 먹고 학원으로 후다닥..저녁도 '공부 지옥'

2012. 9. 16.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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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제대로 저녁 먹을 시간도 없어요

하교뒤 수학학원 끝나면 영어학원

밤11시 학원 끝나면 1시까지 숙제

 

중간에 달려가 김밥·떡볶이 먹고

면발 설익은채로 3분만에 후루룩

편히 앉아 밥먹거나 쉴틈 없어요

 

애니메이션·프라모델·축구 좋아해도

과학고·'인 서울' 대학·대기업 가려면

밥벌이 못할 취미생활은 접어야죠

인권이 최고의 아동·청소년 복지다②저녁이 없는 아이들

"저 3분 만에 먹어야 돼요."

지난 8월20일 저녁 7시12분, 서울 양천구 목동 ㅅ플라자 1층 편의점 앞. 연두색 반팔 티셔츠를 입은 중학교 2학년생 유승렬(가명·15)군이 사발면을 손에 들고 면이 익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둘러멘 책가방이 두툼했다. 책가방 안에는 학원 교재 3권, 학교 교과서 2권, 방과후 교재 1권과 공책 몇 권이 들어 있었다. 유군은 면이 익자 제대로 씹지도 않고 후루룩 삼켰다. 수학학원 수업이 시작되는 7시15분까지 3분 만에 라면을 다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ㅅ플라자는 '학원의 메카'로 불린다. 15층짜리 건물에 학원 70여개가 몰려 있다. 유군은 매일 저녁 7시15분부터 8시50분까지는 수학학원, 밤 9시부터 11시까지는 영어학원에서 수업을 듣는다. 월요일은 특히 바쁘다.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는 3시30분부터 5시까지 과학 방과후 수업을 한다. "전교 60등 정도 하고요. 과학고가 목표예요. 엄마가 하라고 하니까 하는 거죠." 집에 가서도 새벽 1~2시까지 숙제가 이어진다. 유군은 월요일 긴 저녁 시간을 컵라면 하나와, 집에 가는 길에 사 먹는 길거리 음식으로 버틴다.

ㅅ플라자 1·2층은 학원에서 저녁 시간 대부분을 보내는 학생들에게 먹거리를 파는 가게들로 꽉 차 있다. 아이들은 시간대별로 우르르 뛰어내려와 저녁을 해결한다. 오후 6시30분~40분께가 '1차 전쟁'이다. 5시부터 학원 수업을 시작한 아이들의 저녁식사 시간이다. 초등학교 5학년 김정호(가명·12)군은 4층 ㅆ학원에서 뛰어내려와 친구와 함께 편의점으로 직행했다. 사발면을 집어든 김군은 계산하자마자 사발면을 들고 교실로 뛰어올라갔다.

중학교 1학년 최지석(가명·14)군은 학원 과학고반 친구들 4명과 함께 5층에서 1층으로 뛰어내려왔다. 이들도 7시까지 20분 만에 저녁을 해결해야 한다. 7시부터 10시까지 3시간 동안 수업이 이어진다. 최군 일행은 서서 먹는 분식점으로 달려갔다. "순대꼬치 다섯개랑 주먹밥 다섯개요." "떡볶이도 먹을까?" "떡볶이 2인분이요." 이들은 여러 개를 시켜 허겁지겁 먹었다.

70여개의 학원이 있다 보니 학원 수업시간이 다 달라,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 ㅅ플라자 1·2층 식당가는 항상 붐빈다. 이 가운데 편의점이 단연 인기다. ㅈ편의점 직원은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 계속 바쁘다"며 "매일 갖다 놓는 삼각김밥 300여개와 컵라면, 햄버거가 거의 동난다"고 말했다.

학원 수업으로 점철된 저녁시간을 보내는 탓에 아이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은 '저녁밥'뿐만이 아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학원가에서 만난 중학교 2학년 최다빈(15)군은 취미인 프라모델(플라스틱 조립 모형)을 할 시간이 없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저녁 7시40분부터 10시까지 집 근처 특목고 대비 학원에서 영어·수학 수업을 듣는다. 수업 끝나고 집에 가서 영어 받아쓰기나 번역을 하고 나면 밤 12시가 훌쩍 넘는다. 최군은 "초등학교 때에는 프라모델을 자주 만들었는데, 요즘엔 1년에 1번 만든다"고 푸념했다.

중학교 1학년 김유비(14)군의 꿈은 애니메이션 작가이지만, 일상은 공부 위주로 굴러갈 뿐이다. 김군은 오후 5시부터 8시30분까지 자기주도학습 학원에 다닌다. "한 시간 동안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면 그다음엔 우리가 알아서 자기주도적으로 공부하는 학원이에요." 그러나 과목은 국어·영어·수학·사회·과학이다. 애니메이션과 관련한 활동은 언제 하느냐는 질문에 "우선 공부를 잘해야 하니까 애니메이션은 주말에 간혹 본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2학년 김유천(가명)군도 마찬가지다. 김군의 취미는 농구와 축구다. 그러나 김군은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는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학원 수업이 끝나면 독서실로 옮겨, 문을 닫는 밤 12시30분까지 공부한다. 취미생활은 언제 하느냐고 묻자 김군이 답했다. "지금 이 나이에 취미가 있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니에요? 축구나 농구는 토요일에 해요. 축구·농구로 밥 벌어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좋아해도 지금 그거 할 때가 아닌 것 같아요." 김군은 '인 서울'(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는 것)에 성공해서 자동차 관련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다. "공부 잘하면 선택의 폭이 더 넓어지니까요."

대학 실용음악과에 가고 싶었던 박경은(19)양은 고3이 되던 올해 진로를 바꿨다. "실용음악을 해서 뮤지컬 배우나 가수가 되고 싶은데, 저는 인문계 고등학생이고, 학교에선 똑같이 국·영·수 위주의 수업에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끝나면 성적 올리려고 인강(인터넷 강의)을 듣는 게 현실이잖아요. 인문계 고교에서 남들과 다른 진로를 선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 자체가 너무 힘이 들어 평범한 학과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어요."

중1부터 고3까지 다양한 꿈과 소질을 지닌 아이들을 똑같은 틀 안에 가두는 나라, 대한민국 10대의 저녁은 '붕어빵'처럼 똑같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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