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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 총재 사상 탐구]⑦ ‘참부모 하나님’론

관련이슈 문선명 천지인참부모 천주성화(天宙聖和)

입력 : 2012-09-11 22:23:41 수정 : 2012-09-11 22: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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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부모 통한 참가정 완성이 하나님의 창조목적 통일교에서는 ‘하나님을 신상(神相)과 신성(神性)’으로 말하고자 한다. 이는 하나님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속성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조적 측면을 말함으로써 여타의 신학을 넘어서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기독교가 하나님의 구조를 말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일교의 ‘하나님 말하기(God-talk)’는 유일신 종교의 신앙고백 혹은 신학과 다르지 않으나 하나님의 구조를 말함으로써 ‘하나님 말하기’를 그 어떤 신학보다 심층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005년 5월1일 전남 여수에서 열린 통일교 창립 51주년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본행사에 앞서 기도하고 있다.
기독교, 하나님의 전통적 주제는 ‘초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과 세계 그리고 우주는 동심원상에 있는 관계의 그물로 얽힌 하나의 유기체로 이해하는 것이 통일교의 태도다. 통일교는 하나님이 관계의 하나님이며, 관계 속에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관계란 다름 아닌 ‘수수(授受)의 관계’에 있는 하나님을 말하며, 하나님은 인간과 상호작용하면서 약속하고 성취한다. 하나님은 우주와 상호작용하며 존재와 발전을 도모한다. 이뿐만 아니라 인간과 우주도 상호작용함으로써 인간도 우주도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변화를 꾀한다. 이러한 관계의 하나님을 말하는 통일교는 ‘하나님 말하기’를 새롭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관계된 인간과 사회 그리고 우주를 새롭게 말할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피조물과 더욱 가까이 있는 하나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통일교의 하나님을 말하기 전에 기독교의 하나님 말하기 전통을 먼저 살핀다. 통일교가 말하는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 우선하여 기독교의 하나님 말하기의 전승 속에 있기 때문이며, 기독교의 하나님 말하기를 새롭게 함으로써 기독교를 넘어서고자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하나님을 말하는 전통적인 주제는 ‘초월’이었다. 초월이란 인간과 우주를 넘어서 존재하거나 그 위에 있는 존재의 속성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속성을 말할 때 전지·전능·무한·영원·절대 등의 수식어를 쓰는 것 모두 하나님의 존재를 초월적인 그 무엇으로 인식하고 말하고자 하는 결과다. 이와 같이 초월로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인간과 우주를 창조했으나 일정한 거리를 두어 차이를 둔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초월로 말해지는 하나님은 창조된 피조물과 분명한 질적 차이가 있음으로 해서 최고실체(Supreme Substance)다.

초월로 말해지는 하나님은 피조세계와의 관계에서 독립된 절대주권을 가질 뿐만 아니라 행사하는 존재론적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한마디로 ‘저 위에’ 있는 하나님이다. ‘저 위에’ 있는 신의 이미지는 그것이 실재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아니며, 나아가 진실성을 잃고 있음에도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고 지금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하나님을 말하는 또 다른 주제는 ‘인격’이었다. 인격으로 말하는 방법 중의 첫 번째가 하나님을 이성으로 말하기다. 이는 근대 이후 합리주의에 뿌리를 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로 하나님을 말하는 방법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말함에 있어 인간의 이성적 판단을 경험적 느낌보다 우위에 두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근대과학의 시대에 걸맞은 하나님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나님 말하기의 근대적 전이는 흔히 ‘인간학적 전향’과 ‘주체성에로의 봉기’, 혹은 ‘존재의 지배로부터 기술의 지배로 변화’라고 일컬어진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는 방법을 자기 자신의 주체성 안에서 찾는 것을 단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인격으로 말하는 하나님의 두 번째 길은 경험으로 말하기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을 말하는 주체가 되어 하나님을 이해하는 길이며 근대에 이르러 다양화되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주체가 되었을 때 단지 이성만으로 하나님을 말한다고 하는 것에 반기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주체성에는 경험이라는 이성 못지않은 요소가 있음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경험으로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왜 적절한가? 그것은 이성으로 하나님을 말하면서 또 다른 유명론과 관념론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간 인간이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무감정의 하나님”일 수밖에 없었다. 무감정으로서의 하나님은 결코 인간과 세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없다.

기독교의 하나님 말하기는 초월로서 말해온 전승에 더해 이성이든 경험이든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을 말함으로써 각각의 한계가 있다. 다시 말하면 초월의 하나님 말하기가 인간과의 관계를 단절함으로써 하나님 자체가 그의 피조물로부터 소외되는 한계, 그리고 인격의 하나님 말하기가 인간중심적 사고에 함몰되어 위축되거나 폐기되어 가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을 새로운 삼위일체로 말하고자 하는 전망이 있다. 한 하나님의 세 가지 다른 현존의 양식을 밀접하게 말함으로써 초월의 하나님 말하기와 인격의 하나님 말하기를 포함하고 넘어설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인격성은 하나님 안에 영원히 현존하는 그의 영원한 삶의 과정과 결과로 생각해야 하며, 세 가지 다른 현존의 양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 인격성은 그의 영원한 삶을 수행한다고 본다. 

지난 2월27일 경기도 구리 일화중앙연수원에서 ‘천지인참부모 승리완성해방시대 개문 세계무도대회’가 열렸다.
통일교, 사랑의 동기인 심정의 하나님


그렇다면 통일교의 하나님 말하기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통일교의 하나님 말하기의 바탕은 하나님을 심정으로 말하는 것에 둔다는 점이다. 사랑의 정적 동기와 충동을 심정이라고 함으로써 통일교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성이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은 피조세계를 창조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한 사랑의 동기가 심정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심정으로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초월로 하나님을 말하는 전통적 사고를 넘어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심정에 바탕을 두고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이법, 곧 이치와 법도의 하나님을 말할 수 있을지언정 단순한 초월만으로 하나님을 말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법(Logos)의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 세운 원리를 초월하는 존재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이법을 초월한 존재가 아니라 이법의 주체로 존재한다.

또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 그리고 경험으로만 말하는 하나님을 넘어서고 있다. 심정이 인격적 표현임에 틀림없지만 심정을 신성의 하나이자 근본임을 설명하고 있는 통일교에서는 인격적 표현을 넘어서고 있다. 심정은 하나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정의 하나님은 인간 그리고 세상에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하나님이 주체라면 피조세계는 대상이다. 주체와 대상은 그 격위를 표현하는 것일 뿐 불가분리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주체와 대상의 수수적 관계의 터전이 곧 심정이며 사랑이다. 따라서 심정으로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이성은 물론 경험을 통해 말해지는 하나님보다 보편적이며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다.

통일교의 하나님 말하기는 하나님이 남성격으로 그리고 여성격으로 동시에 말해질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이기 때문에 본성상적 남성과 본형상적 여성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로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남성격 주체로 말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격 대상으로도 말해질 수 있다. 여기서 주체와 대상이라고 하는 격위이기 때문에 남성격으로만 하나님의 본체를 말할 수 없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남성격으로만 말함으로써 기독교회와 그 문화에 가부장적 질서가 생겼고, 그 질서의 현존이 하나님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일교는 하나님은 참아버님으로 동시에 참어머님으로 말할 수 있다. 나아가 통일교의 하나님 말하기는 참아버님 하나님과 참어머님 하나님을 아우른 참부모 하나님이다.

참부모로서의 하나님을 말하기 전에 참부모란 무엇인가를 정의할 필요가 있다. 먼저 참이란 거짓에 대한 상대적 의미를 넘어서서 전체, 곧 공적이라는 뜻이 강조되어야 한다. 문선명 선생의 말씀에 의하면 “참이란 것은 개인에게 한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를 넘고 넘어서 적용되고, 전체를 넘고 넘어서 가치적인 인연을 맺고자 하는 것이 참입니다. 참은 누구나 좋아하고 누구나 찾는 것이기 때문에 어디에나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참이란 반드시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그 기원이 하나님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중심에 자리하지 않으면 참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라고 하는 기원이 없으면 참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하나님은 무한한 공적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부모는 인류의 희망이며 하나님의 소망이 된다. 하나님은 자기 현현으로 참부모로서 나타나고자 한다. 하나님은 참부모로서의 계시다. 이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참부모로서의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낼 것이다. 타락한 인류의 참된 구원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참부모 이상을 성취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참부모로 달성하겠다고 하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계시되나? 하나님의 현존이 우리 인간에게는 늘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본성 자체로서 하나의 ‘놀라운 신비(mysterium tremendum)’이다.

문선명·한학자 총재 내외가 2005년 2월14일 천주청평수련원에서 세계평화정상회의 축하만찬을 주재하고 있다.
하나님, 참부모 하나님으로 顯現한다


참부모로서의 계시는 계시의 계속성을 토대로 할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하나님의 계시를 계승한다. 역사가 계속되는 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계속된다고 하는 역사로서의 계시 사상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참부모로서의 계시는 역사 속에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계속되며, 역사의 미래에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사건화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참부모로서의 계시는 역사적 유비를 꾀한다. 다시 말하면 역사의 완성은 ‘본연’에 대한 복귀이며, 이는 예수 때처럼 재림 때에도 직접계시에 의해 성취될 것이기 때문에 동시 동형적 유비는 이루어진다고 그 가능성을 천명하고 있다.

따라서 부활은 십자가 처형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재림, 곧 파루시아의 조짐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은 그 신화적 성격을 넘어선다. 부활을 ‘비신화화’함으로써 역사성을 부인할 필요가 없게 된다. 부활의 의미가 역사화됨으로써 부활의 역사성은 그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원리강론’은 “아담과 해와가 창조이상을 완성하여 인류의 참부모가 되었더라면, 그로부터 태어난 자녀들은 원죄가 없는 선의 자녀가 되어 지상천국을 이루었을 것이었다”라고 말함으로써 처음 예수 오심의 본연은 참부모를 복귀하는 것임이 분명해졌다. 

문선명 총재(화면 속)가 2005년 8월1일 충남 천안유관순체육관에서 열린 4억쌍 6차 국제합동축복결혼식을 위해 세계 각국에서 모인 신랑·신부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하고 있다.
오늘의 하나님, 고통의 심정에 사로잡혀


하나님은 신약시대에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로서의 계시, 그리고 신약시대 이후 역사로서의 계시는 계속되어 오늘날, 곧 성약시대에는 참부모로서 계시하심이 분명하다. 그것은 이미 밝힌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이상과 창조목적이 참부모를 통한 참가정의 이상과 그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세웠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참사랑으로 수수작용을 통해 일체가 되는 참가정에 있었다. 그러한 참가정을 중심으로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이상이기 때문에 참가정을 이루는 참부모는 하나님 섭리의 중심이 된다. 그러나 인간 조상의 타락은 그와 같은 이상을 잃게 하였고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복귀섭리를 앞장서 이끌어 오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참부모로 계시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이상이고 창조실현이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은 참아버지로 계시되었고 참어머니를 맞이하여 비로소 참부모로 계시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또다시 감추인 계시가 되고 말았다. 이제 성약시대를 맞이하여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와 역사를 넘어 참부모로 계시되어야 하며, 이미 성취되었다. 따라서 참부모로서의 계시는 역사로서의 계시를 넘어서서 역사 완성의 계시라고 할 수 있다. 참부모로서의 계시는 참부모 하나님의 자기 계시요 자기현현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하나님은 참부모 하나님으로 말해져야 한다. 그와 같은 이유는 하나님의 새로운 말하기가 그간 말해온 하나님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현실인 오늘 인류가 처한 긴급하고도 궁극적인 현실은 무엇인가? 역사에 대한 현실 문제다. 하나님이 관심하는 인간의 현실은 인간의 고난에 관한 것이다. 참부모 하나님은 인간의 고난을 결코 외면하시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인간의 고난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치유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경험이며 그 경험은 고난의 경험을 공통의 기초로 한다. 삶을 창조하고 생동하게 하는 사랑은 고난의 긍정에서 시작된다. 죄 없는 고난을 긍정적으로 말하면 사랑의 고난이요 사랑을 받는 자들의 고난이다. 사랑에는 오직 죄 없는 고난이 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난으로 고난을 당하며 다른 사람의 고통에서 자기의 고통을 경험한다.

그런데 사랑의 깊이에는 심정(心情)이 있다. 심정이란 사랑의 성상이며 근원이다. 심정은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그리고 복귀의 원력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인간 감정으로 표현한다면 기쁨이다. 인간타락은 하나님의 심정을 슬픔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복귀섭리를 시작하고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를 전개했다. 때때마다 변절하는 인간 때문에 하나님은 에이는 고통을 받는다. 기쁨과 슬픔 그리고 고통은 모두 하나님의 심정이 되었다. 그러한 심정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고통의 심정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현실은 고통의 심정이었고 고난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복귀섭리의 와중에서 또다시 타락하는, 그리고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인간 때문에 자유로운 하나님은 역사 이래 한 번도 고통의 산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고통의 심정에 사로잡힌 분이며 고난당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참부모 하나님이다.

김항제 선문대 신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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