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성폭행 가해자에겐 2천만 원, 피해자에겐 5백만 원

신승이 기자 입력 2012. 9. 6. 14:30 수정 2012. 9. 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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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 지원센터인 서울 해바라기 여성아동센터에서 만난 주부는 기자와 만나 자신의 딸에게 닥친 어마어마한 고통을 담담히 얘기해 갔습니다. 딸은 만 7살부터 무려 12년 동안 아버지로부터 지속적인 성폭행과 협박을 당해 왔고, 어머니는 그 사실을 지난해에야 알게 됐다고 합니다. 밝고 명랑하던 딸은 사춘기 시절부터 말이 없어지더니 이제는 아예 어린아이처럼 말이 어눌해지고 돌발 행동을 하면서 퇴행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정신과 진료를 받고 있는데 언제 끝날지 과연 효과는 있을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다만 병원 측은 적어도 아이가 고통 받은 시간만큼은 반드시 심리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는군요.

피해자의 고통 뿐 아닙니다. 직장에 나가느라 딸을 잘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 딸 아이의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떨쳐낼 수 없는 불안과 절망에 어머니는 힘들어 했습니다. 조금 더 일찍 여동생의 피해 사실을 알았던 오빠는 아예 동생을 제대로 볼 수 없을 만큼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이 피해자는 센터의 도움을 받아 1년에 천만 원 가까이 하는 병원 치료를 받을 수 있었지만 가족들은 피해자를 돌보고 치유하느라 자신들의 상처는 전혀 돌아볼 겨를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성폭력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피해자가 안정을 되찾고 회복하기 위해 가족들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미성년자 피해자, 특히 나이가 어릴수록 자신의 울타리가 되어 주는 부모 형제의 심리 상태가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 가정처럼 가족에 대한 돌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가족 치료의 필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넉넉하지 못한 국가의 지원입니다. 사실 성폭력을 경험한 피해자가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치료비는 1년에 5백만 원 이내입니다. 어린 나이에 당하는 성폭력의 경우 큰 외상으로 이어질 수 있고, 대부분의 성폭력 피해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심리 치료가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부족한 금액입니다.

성폭력피해자 치료비는 법무부가 관리하는 범죄피해자지원기금에서 마련됩니다. 이 기금은 630억 원 정도인데 치료비는 10억 원 정도 밖에 안 됩니다. 매년 성폭력 피해자가 증가해 경찰청에 신고된 것만 연 2만 건이 넘는데 치료비 예산은 늘 제자리입니다.

특히 지난 한 해 전국 성폭력 상담소에 접수된 성폭력 피해 상담이 5만 건 정도인데 이 중에서 치료비를 지원 받은 사람은 9천 7백 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마저도 3억 원 넘는 금액은 다음 예산에서 당겨쓴 이른바 '외상 지원'입니다. 피해자에 대한 지원이 이 정도이니 가족들까지 지원해 줄 여력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원칙적으로 치료비 지원은 성폭력 피해자 또는 가족이 대상이지만 이런 여건 때문에 실제로 가족이 치료비 지원을 받는 경우는 1%에도 못 미친다는 게 상담소 관계자들의 얘기였습니다.

정부도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여성가족부는 부족한 치료비 예산을 늘리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만성적인 적자 운영을 해 왔던 치료비 지원을 개선하기 위해 우선 적자 부분에 대해 4억 원의 예산을 추가로 책정하고, 가족 치료를 위한 별도 예산도 마련하겠다는 계획입니다. 아직 기획재정부와 협의 중이어서 구체적인 예산은 잡히지 않았지만 가장 시급한 만 13세 미만 피해자 부모를 1차 대상으로 가정하면 약 2천 명 정도에 대한 예산이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부족한 건 이뿐만이 아닙니다. 아르바이트 고용주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서산 여대생 사건 기억 하실 겁니다. 고인을 잘 따르던 일곱 살 난 어린 동생은 사건 이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에는 전문적인 심리 치료를 맡아 줄 지원센터가 없습니다. 여성가족부의 의료비 지원도 별도로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역 여성단체들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기초적인 발달 검사를 몇 차례 하는데 그쳐 효과를 제대로 거둘지 의문이라고 합니다.

성폭력 피해를 겪을 경우 초기 상담과 법률 지원, 의료 지원, 그리고 의료 기관과의 연계, 사후 관리 등을 통합해 지원해 주는 통합지원센터는 우리나라에 여섯 개 밖에 없습니다. 피해자 동생이 지원센터를 찾으려면 차를 타고 몇 시간 거리를 가야 한다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겠지요.

성폭력 사건을 저지른 가해자 한 명을 구속해 교도소에서 관리하는 데 얼마가 쓰이는지 알고 계십니까? 1년에 드는 직간접 비용이 2천 백 만 원 정도입니다. 하지만 정작 성폭력 피해자에게 돌아가는 돈은 4분의 1에 못 미치고 이 조차 받지 못하는 피해자와 가족들은 부지기수입니다.

이 때문에 성폭력 피해자 등 범죄 피해에 대한 지원을 기금이 아닌 일반 회계로 돌려 좀 더 안정적으로 재원을 마련하고 피해 지원 규모를 획기적으로 늘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폭력 사건을 예방하는 게 가장 최우선이겠지만 예방, 가해자 처벌 못지않게 흉악한 범죄로 인해 개인과 가족의 행복이 무참히 파괴된 이들을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보듬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해 보입니다.신승이 기자 seungye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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