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간 아버지가 몹쓸짓..이젠 좀 말해야겠다"

2012. 8. 1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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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친족 성폭력 피해 수기 낸 여성

초등 6학년 때 중절수술까지

말하면 죽여버린다 협박당해

탈출했다 잡히면 가혹한 매질

"창피해할 이는 가해자 자신

피해자 숨지 말고 도움받길"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친족 성폭력 피해자가 낸 수기가 발간됐다. 15일 서점에 배포된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어느 성폭력 생존자의 빛나는 치유 일기>(이매진)다. 지은이 은수연(가명)씨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9년 동안 목사인 아버지로부터 가정폭력을 동반한 성폭력(강간, 강제추행 등)을 겪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낙태수술도 감당해야 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여관에 끌려갔다가, 몰래 주인에게 '납치됐다'며 구조 요청을 한 뒤 가까스로 경찰서로 도망쳤다. 경찰의 적절한 조처 덕에 아버지는 구속돼 7년간 복역한 뒤 출소했다. 마침 그때 친족 성폭력에 대해선 친고죄를 폐지한 '성폭력 특별법'이 시행돼, 두려움에 떠는 피해자의 고소 없이도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었던 것이다.

10년 동안 피를 토하듯 조금씩 써 내려간 글을 세상에 내보낸 지은이를 15일 서울지하철 2호선 역 인근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성실한 30대 직장인으로서 일에 대한 열정을 얘기하는 그의 눈은 빛났고, 목소리엔 힘이 실려 있었다.

책을 낸 동기에 대해 그는 "내가 겪은 일은 이 사회에 없는 일이 아니고, 나만 겪은 일도 아니며 널리 존재하는 고통"이라며 "내가 입을 닫고 죽으면 드러나지 않겠지만, 그렇게 묻어두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다 토해내니 시원하다"며 웃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그는 9년 동안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 아버지가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죽여버릴 거야"라고 협박했기 때문이다. 은씨는 책에서 "나는 좀 말해야겠다"고 여러번 썼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하면서 내 잘못이 아니라 아버지의 잘못인 걸 알게 되고 홀가분해졌어요. 책에서 '아버지에게 수치심종합선물세트를 드린다'고 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어린 시절 학교를 마치고 나오면 아버지가 교문 앞에서 기다리곤 했다. 딸이 달아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은씨는 책에서 "나는 그저 그 사람이 나라는 존재, 그러니까 마음대로 가지고 놀고, 괴롭힐 나라는 존재를 가지러 온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렇게 점점 물건이 돼가고 있었다"고 썼다. 탈출을 해 잡혀올 때마다 가혹한 매질과 성폭력이 이어졌다.

엄마는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아버지의 폭력 탓에 겁에 질려 그를 돕지 못했다. 은씨는 가족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해를 하려고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30살 때 돌아가신 엄마와는 그 직전에 화해했다.

"왜 아빠를 말리지 못했냐고 물었더니 '나도 죽을 것 같았다'고 하시더군요. 화해를 하고 엄마와 단둘이 여행을 가려 했는데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죠. 엄마도 여자로서 불쌍해요."

남동생은 "남자들이 읽도록, 좋은 책이 되도록 잘 써보라"고 지지해줬다. 은씨는 "부모 복은 없지만 인복이 있는 편"이라며 웃었다. 국내외 친구들 또한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줘 곧 출판기념 파티도 열 예정이다.

그동안 그는 10년 넘게 여성단체 등에서 성폭력 피해자 지원활동을 하면서 스스로 치유에도 힘썼다. 집단상담, 치유글쓰기, 사이코드라마 워크숍 등에 부지런히 참가했다. "특히 영화 <도가니>를 보면서 수백만 관객들이 성폭력을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일반인들의 공감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돼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물론 두려움도 있다. 오해나 편견 탓에 비난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친족 성폭력 피해를 당한 기간이 길다고 해서 피해 생존자들이 그 삶을 허용하거나 즐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한다"며 "이 책은 한 여자아이가 겪었던 '폭력'에 관한 얘기이지 '성'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창피해할 이들은 가해자 자신들입니다. 아버지에게 끌려가며 시내 한복판에서 저의 피해 사실을 말하며 도와달라고 했지만 누구도 손 내밀지 않았어요. 제 외침은 '커밍 아웃'이 아닌 '스피크 아웃'입니다. 세상에 크게 외치는 거죠. 목숨 걸고 사막을 건너 신세계를 만난 사람의 이야기처럼 저도 죽다 살아난 것 같습니다. 쓰지 않으면, 신세계가 온전히 열릴 것 같지 않았어요."

그는 "피해자들도 이제는 문제에서 뛰어나와 당신의 문제를 도와줄 빛나는 친구들을 만나보라고 말해주고 싶다"며 "피해자를 넘어 생존자가 되어 당신의 눈물도 빛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성폭력 은폐 심각…추정피해율, 공식통계 8배

신고율 연간 7~10% 불과친족·친인척 범죄가 절반여성 탓으로 책임 돌리기 등일반인 그릇된 통념도 여전

한국의 성폭력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공식 통계만 놓고 보면 사실이 아니다. 성폭력에 대한 유엔의 공식 통계를 보면, 2009년 여성 인구 10만명당 성폭력 발생 건수는 영국 79.5명, 독일 59.6명, 프랑스 37.2명, 한국 33.7명, 일본 6.4명 등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암수범죄'(실제로는 발생했으나 신고되지 않아 공식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 범죄)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 은폐된 성폭력

대검찰청이 매년 발간하는 <범죄분석>을 보면, 2000년 1만여건이던 강간·강제추행 등 성폭력 범죄 발생 건수가 2010년에는 1만9939건으로 10년 사이 2배로 늘었다. 그러나 성폭력 범죄 신고율은 연간 7~10% 안팎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2008년 여성가족부 성폭력 실태조사를 보면, 10만명당 성폭력 피해율은 공식 통계의 8배인 467.7명으로 나타났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강은영 연구위원은 "최근 성폭력 신고율이 늘어났지만 친족 성폭력 등은 드러나지 않고 있어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2011년 한국성폭력상담소 통계를 보면, 어린이 성폭력 피해 상담 188건 중 친족과 친인척에 의한 성폭력이 각각 53.5%(69건), 43.9%(26건)로 나타났다. 성폭력이 피해자의 생활공간과 일상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이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는 "미국의 경우 성폭력 신고율이 40%에 이른다"며 "최근 성폭력 사건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무죄평결이 나오는 등 일반 국민들의 그릇된 통념이 여전하다"고 지적했다.

■ 뿌리 깊은 고정관념, 피해자 유발론

성폭력 범죄의 책임을 여성 탓으로 돌리는 '피해자 유발론'도 뿌리 깊다. 한 여성단체 관계자는 "지난 7월 의부의 성폭력 사건을 다룬 공판이 끝난 뒤 담당 검사가 피해자에게 '네 아버지랑 사귀었던 것 아니냐' '너도 좋아서 했던 것 아니냐'라고 말해 피해자가 절규하며 항의하는 등 2차 피해를 유발한 일도 있었다"고 전했다. 지난달 경남 통영에서 발생한 초등학생 한아무개(10)양 납치·살해 사건 피의자인 김아무개(44)씨는 "(피해자가) 짧은 분홍색 치마를 입고 있어서 순간적인 충동을 느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임윤경 연세대 문화학협동과정 교수는 "여자아이들의 치마를 들추는 것에 대해 '네가 맘에 들어서 그런 것'이라고 관대하게 대하는 행태나 여성을 폄하하는 시선이 문제인데, 이를 '남성답다'고 보는 시각에서 여성들 또한 자유롭지 않다"고 말했다.

■ 위축되는 여자들

권인숙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가 지난해 9월부터 11월 사이 서울·경기지역 여대생 91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여대생 64.8%가 밤길이 불안하다고 답했다. 밤길을 다니지 않는다고 답한 비율이 43%였고, 옷차림을 조심한다는 답변도 28.3%였다. 권 교수는 "성폭력 사건의 위험성을 강조할수록 공포가 커지고 자기 통제가 매우 심해지며, 엄마들은 딸들 치마 안에 속바지를 입히는 등 옷차림에 대한 의미 부여를 많이 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이명박 정부의 경우 성폭력 사건을 정치적으로 잘 활용해 국가가 매우 멋지게 대응하고 있는 듯한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지만, 전자발찌, 신상공개 등 제도 시행으로 나타나는 통제 메커니즘은 여성들에게 의존적이며 자기 억압적인 여성상을 형성하게 된다"고 말했다. 또 "특정 사건에 대한 경쟁적 보도나 정부의 대처는 몰정치적인 과정이 아니며, 공포가 확산되면 여성들에게 더 깊고 장기적인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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