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서울 온 라디오헤드 'Creep' 부르는 대신 '아트'를 펼쳤다

입력 2012. 7. 31. 03:12 수정 2012. 7. 31.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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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30일 월요일 흐림/비. 라디오헤드로 철학하지 않고 잠들기.
트랙 #20 Radiohead 'Fitter Happier'(1997년)

[동아일보]

27일 밤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에서 열창하는 라디오헤드의 보컬 톰 요크. 최근작을 중심으로 130분간 20여 곡을 들려줬다. CJ E & M 제공

'@radiohead'는 날 팔로하지 않는다. 내 '친구'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날 따라다닌다.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악몽처럼 잠재의식에 들러붙어, 유령처럼.

27일 오후 10시 40분 경기 이천시 지산포레스트리조트 특설무대. 2012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 첫날 헤드라이너로 나선 라디오헤드의 앙코르 세 번째 곡이 끝난 뒤였다.

'서울 시내에서 운전하기 힘들어요…. 좌회전, 좌회전, 우회전….'

암전된 무대 쪽에서 3만여 명의 관객을 향해 알 수 없는 한국말이 흘렀다. 3초쯤 지나자 '한국말이야'라는 수군거림이 객석(잔디밭 위) 여기저기서 번졌다. 그때 조명이 켜지며 '더 내셔널 앤섬'의 반복 악절이 터져 나왔다. 라디오헤드가 전자음악을 전폭 수용해 만든 난해한 앨범 '키드 에이'(2000년) 수록 곡. '모두들… 모두들 여기 모였어… 모두 닮았어… 모두 겁을 먹었어….' 보컬 톰 요크가 부서질 듯 불안한 목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는 다음 날 비슷한 시각 무대에 선 영국의 실험적인 뮤지션 제임스 블레이크의 '내 형제도, 자매도 말을 걸지 않아. 하지만 그들을 탓하지 않아'('아이 네버 런트 투 셰어' 중)의 반복 어구로 이어졌다. 이제 겨우 20대 초반인 신성 제임스 블레이크는 전자음악의 한계점을 넘나들었고 '지산'을 거대한 음악 실험실로 만들면서 라디오헤드의 뺨을 후려쳤다.

라디오헤드는 최대 히트곡 '크립'을 부르는 대신, 예상대로 그들 나름의 '아트'를 하고 갔다. 한국 라디오 방송을 녹음해 내놓은 듯한 '더 내셔널 앤섬'의 도입부 외에도 멤버들의 실시간 연주 영상에 TV의 노이즈 효과를 겹쳐 빛바랜 사진 톤으로 12개의 분할 스크린 위에 펼쳐내는 등 의미심장한 연출이 많았다.

얼마 전 '라디오헤드로 철학하기'라는 책도 나왔다. 무식해서 그런지 음악 앞에 어려운 철학자나 미학자 이름이 나열되는 게 마뜩잖았지만 이 책은 라디오헤드 음악의 '연약함'과 '애매모호함'이 깃든 직관의 영역을 무리한 분석으로 침범하지 않아 읽을 만했다.

아직도 가끔 '라디오헤드 악몽'을 꾼다. 그들은 현실에 현실적으로 저항하는 대신 '우리는, 지금, 불안하고, 두렵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불안하고, 두렵고, 외롭다'는 메시지 조각들을 잠재의식 속에 자꾸만 꿈처럼 심어놓는다.

현실적인 악기들 위를 유령이 돼 부유하는 조니 그린우드(기타)의 옹드 마르트노(세러민과 비슷한 전자악기) 음향에 이끌린다. 잠행하는 폴리리듬에 맞춰 내 꿈의 스크린 위에 기하학적 무늬가 번진다. 잠이 온다. 옛날처럼 자꾸만 잠이 온다. 저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기는 공포성(恐怖省)이다. 9-17 섹션이 공격당한 것 같다. 다음의 프로세스를 구동하라.'('피터 해피어' 중)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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