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담대한 눈으로 다시 보기

신주백 2012. 7. 19.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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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핵무장 재개 움직임, 한·일 군사정보협정 논란 등으로 한·중·일 3국 간의 긴장이 가파르게 고조되고 있는 이즈음, 의미 있는 책 한 권이 나왔다. 3국 역사학자가 11년에 걸친 공동 작업 끝에 내놓은 <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1, 2 > (휴머니스트 펴냄)가 그것이다. "과거를 공유할 때 비로소 미래로부터 들려오는 희망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백영서 연세대 교수)라는 추천사처럼, 이 책은 온전한 역사인식이 뒷받침될 때 한·미·일 동맹 일변도의 낡은 틀에서 벗어나 한반도의 미래도 다시 그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2001년 일본의 우익단체에서 만든 중학교 역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했다. 일본의 대외적 침략과 지배를 옹호하는 역사관을 거침없이 드러낸 교과서였기에 당연히 주변 국가의 반발이 뒤따랐다.

역사 교과서의 내용을 왜곡한 세력은 뚜렷한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평화헌법을 개정해 국군을 보유할 수 있는 일본의 '보통국가화'를 달성하기 위해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교과서를 활용해왔다. 이미 발행된 교과서를 비판하며 공격적인 논쟁을 유도함으로써 자신의 역사관을 선전하고 반대세력을 매도했다.

동아시아 '지역사'를 서술한 <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 .

역사 왜곡 세력이 일본인의 역사 인식을 지배하는 한, 한국과 중국은 영원히 일본과 화해할 수 없을 것이고, 동아시아의 미래는 안정과 협력보다 갈등과 대결의 시대로 향할 것이 뻔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한 역사학자와 교사들이 2002년 '한중일 3국 공동역사편찬위원회'를 만들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싸우고만 있을 것인가. 서로 만나 이야기하면 함께할 수 있는 역사 인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후 4년여의 노력 끝에 2005년 < 미래를 여는 역사 > 를 3국에서 공동으로 출판했다. 다시 2006년 11월부터 6년간의 협력을 통해 두 번째 공동 역사 교재인 <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1, 2 > 를 출간할 수 있었다.

첫 번째 교재를 만들기 시작할 때만 해도 우리 스스로 '정말 이것이 가능할까'라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나에게 당연한 문화가 상대에게는 몹시 생소한 것일 수 있음을 확인할 때도 자주 있었다. 가령 주말에 학술회의 하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언어의 차이도 극복해야 할 장벽이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각각 < 미래를 여는 역사 > (일본어 제목은 < 未を開く史 > )라는 이름으로 책이 발간됐지만, 중국은 적절한 말이 없어 < 동아시아 3국 근현대사(東亞三國的近現代史) > 라는 제목을 붙였다.

자국의 역사 아닌 부분도 집필

불확실성과 문화 격차, 언어의 차이를 극복하며 나온 첫 번째 교재는, 정부와 민간 차원을 통틀어 한·중·일이 함께 모여 만든 첫 결과물이었다. 그만큼 한·중·일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빈약했다. 상대방과 역사를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는 태도는 이념에 따라 편가르기를 해왔던 냉전체제와 한반도·중국·베트남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의 분단이라는 구조적 요인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처럼 협력하면 동아시아에서 조그마한 작품이라도 만들 수 있다는 사회심리를 첫 번째 공동 역사교재가 조성했다고 믿고 싶다.

국제관계와 사람의 교류라는 측면에서 동아시아의 근현대사를 다룬 두 번째 교재 역시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온 결과물이었다. 첫 번째 교재는 각자 자국 역사를 집필한 원고에 기초해 토론을 진행한 결과물이었다. 그만큼 연구에 자신이 없었고, 신뢰 수준이 낮았다. 하지만 두 번째 책은 '장' 단위로 집필을 분담했으므로 참가자들은 자국의 역사가 아닌 부분도 집필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언어의 장벽을 넘는 것은 물론이고, 자료를 취사선택하고 정밀하게 연구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강력한 협력관계가 필요했다. 분량 또한 첫 번째 공동 역사교재에 비해 3배 이상 늘어나 있었다. 신뢰와 성실함이 밑바탕에 깔려 있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기획을 시도한 셈이다.

ⓒ시사IN 윤무영 지난해 3월30일 일본 역사왜곡 교과서 검정통과에 항의하는 시민들. 일본의 우익 교과서에 대한 문제의식이 한ㆍ중ㆍ일 공동 역사서를 만드는 계기가 됐다.

두 번째 교재는 내용 면에서도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우리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한·중·일 3국의 근대사를 각각 합쳐놓았다는 첫 번째 교재의 문제점을 뛰어넘으려 노력했다. 이때 우리가 주목한 관점이자 태도는 '지역으로서 동아시아'였다. 지역사를 기술하려는 움직임은 양국 간 관계사와 차원을 달리하는 접근법으로 냉전이 해체된 이후, 특히 '아세안(ASEAN)+3'처럼 21세기 들어 급속히 형성되고 있는 동아시아에서의 지역 만들기 움직임과 같은 선상에 있다. 더구나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미래의 무엇인가를 만들려는 움직임이라는 점에서도 서로 일치한다.

다른 집필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공동 역사교재의 개발과 함께 40대를 온전히 보냈기에 필자도 남다른 감회를 갖고 있다. 그중에서도 중국 및 일본의 연구자들과 함께 한국 근현대사를 넘어서는 시야와 관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무척 만족스럽다.

한국에서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국가가 중국의 국가에 종속되어 있었다는 점을 의식해 조공-책봉 체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심한 경우는 자기비하를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과 주변국 사이에 정치적 이해관계가 조정된 시스템으로서 책봉-조공 질서를 이해하고 있다.

왜 일본군이 시베리아에 있었을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 청·일본·러시아를 지원한 열강의 세력 구도는 동아시아적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세계사 수업시간에 배우고 있는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 영국의 3C정책과 독일의 3B정책의 대결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또한 유럽에서의 세력관계도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결국 3개의 다른 차원 곧, 3국-지역-세계를 연결해 살펴보면 당시의 역사를 더 풍부하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청산리전투에 대한 지식은 1920년 10월의 간도참변을 조작한 일본군이 독립군을 제압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과 시베리아에 있던 부대를 동원했다는 정도다. 우리의 역사교육에서는 이것 이상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일본은 조선의 독립군을 제압하기 위해서만 간도를 침략했을까. 간도는 중국 땅인데, 어떻게 무단으로 공격할 수 있었을까. 또, 러시아의 시베리아 땅에 왜 일본군이 있었을까. 당시 독립군은 '체코 군단'이 내다파는 무기를 구입해 무장력을 갖추었는데, '체코 군단'이란 무엇일까. 제1권의 4장에서는 지역사의 측면에서 이를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지역을 주목하면 역사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고 자국 중심의 역사인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배타성을 극복하고 상호 공존을 지향하며,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데 길라잡이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지역을 주목해야만 우리의 지난 역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한반도의 분단을 극복하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140여 년 전의 개항, 120여 년 전의 청·일전쟁, 100여 년 전의 러·일전쟁과 을사조약 그리고 한일병합, 70여 년 전의 신탁통치 그리고 한반도의 분단. 당시의 강국은 지금도 강국이고, 앞으로도 강국일 것이다. 이들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했고, 선택을 강요당했는가를 의식적으로 주목해야 한다.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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