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숙의 만남] '경상도 출신' 서도소리 명창 박정욱

서화숙선임기자 2012. 6. 10.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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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심가는 내지르면서도 참는 것.. 내 삶처럼 처절한 소리에 꽂혔죠"

어릴때부터 굿판 따라다녀

외할아버지 사망후 집안은 풍비박산어린가슴에 한 맺혔던지 소리 들으면 편해져

고교때 무작정 서울로

소리 배우고 싶어 요리사 자격증까지특전사 취사병 입대후 김정연의 수심가 만나

"국악, 제대로 격식있게"

공연 의상비가 없어 한복 짓는 기술도 배워국악도 외부지원 없이 자기 힘으로 되살아나야

박정욱(47) 명창은 국악계에서 퍽 신통한 존재이다. 그는 무형문화재 29호인 서도소리 분야에서 이수자에 그쳤지만 가장 인기있는 공연자이다. 그는 또 한복도 잘 짓고 궁중요리도 잘 만든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전통혼례를 재현하면 그가 나서고 쇳대박물관의 설립자인 최홍규씨가 최근 아들을 혼인시키면서 치러진 전통혼례 역시 그의 주관으로 진행되었다. 그가 서울 중구 신당동의 재봉공장 건물 꼭대기층에 세운 가례헌이라는 국악사랑방에서는 매주 목요일이면 유망한 국악인들이 공연을 한다. 마이크에 기대지 않고 국악의 우아한 격식을 지킨다. 그는 국악분야에 드문 사회적 기업, 한국서도소리연구보존회의 대표이기도 하다.새로운 방식으로 오래된 것을 지키는 그를 만났다.

_서도소리가 뭡니까.

"황해도와 평안도 즉 관서지방에서 내려오는 성악곡이에요. 전라도의 남도소리와 대비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수심가 배뱅이굿이 유명하지요. 배뱅이굿 자체가 남도의 판소리를 듣고 재구성한 서도지역의 판소리에요. 판소리 명창들이 구한말에 평양까지 올라와서 모흥갑이 능라도에서 공연을 하니까 평양 사람들이 완전히 빠진 거에요. 서도소리 명창들이 이러다가 밥그릇을 빼앗기겠다 그래서 19세기 말에 배뱅이굿을 만들었어요. 판소리는 효도하는 심청이는 죽었다 살아나고 형제우애하는 흥부는 박에서 보물이 나오고, 유교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지만 배뱅이굿은 사기꾼이 가짜 굿을 해서 배뱅이 부모를 속여서 한탕하고 떠난다는 내용이니 당대의 현실을 그대로 그린 작품이지요."

_경상도 사람이 어떻게 서도소리를 하게 됐어요?

"석촌호수에 서울놀이마당이 생겼을 때니까 84년 12월말인가봐요. 그때 송파에 있는 특전사 취사병으로 있었어요. 눈이 펑펑 오는 날 쌀떡을 해서 부대로 가는데 어디서 노래소리가 나는데 기가 막힌 거에요. 가슴을 팍팍 찢는데 듣도 보도 못한 소리였어요. 차를 대고 내려갔더니 관람객은 몇 명 없는데 할머니 한 분이 문화재 공연이라고 하는 거에요. 김정연(1913~1987) 선생님이었어요. 그게 수심가였지요. 다 듣고 분장실로 갔더니 집에 한번 오라는데 인간문화재한테 배우려면 얼마나 돈이 드나 싶어서 대답도 못했어요. 그때 제가 특전사 파티가 있으면 파티 음식도 잘하니까 외출 외박도 쉬울 때였어요. 그 소리가 밤마다 콱콱 치는 거에요. 창전동의 댁으로 거의 매일 찾아갔는데 공부하는 걸 보니까 가관이에요. 선생님은 목을 꺾어서 하는데 다들 그냥 편하게 가요. 하루는 아무도 안 와서 둘만 있는데 제가 물었어요. 왜 사람들이 선생님이 가르치는대로 안하느냐고. 해보라고 해서 들은대로 했더니 시조도 하느냐고 해서 했더니 '간밤에 엄마가 꿈에 보이더니 백년에 한번 나는 사람이 왔구나'. 전수장학생으로 넣어주셔서 청소하고 밥해드리면서 공부를 시작해서 86년 휴가기간에 전주대사습에 나가서 '수심가'로 장려상을 받았어요. 제대 후에는 아예 선생님 댁에서 살면서 소리를 배웠어요. 선생님이 말년이라 두 시간 청소하고 세 시간 안마하고 15분 배우는 식이었지요. 선생님 돌아가시고는 이은관 선생님한테 배뱅이굿 배우고 여기 저기 찾아다니면서 소리를 배웠어요."

_서도소리 이전부터 소리는 했네요.

"외가가 거창 신씨 종가집인데 외할아버지(신흥범)가 보도연맹 사건(좌익활동을 하던 이들을 전향시킨다는 명목으로 1949년 만들어졌으나 실제로는 반정부 인사들과 군경과 사이나쁜 사람까지 가입시킨 후 50년 7~9월에 이들을 좌익사범으로 몰아 학살한 사건)으로 돌아가시면서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어요. 외갓집에는 딸만 넷인데 엄마가 맏딸이니까 저는 외가에서 살았어요. 원래 진주 사람인 아버지는 외갓집이 있던 마리지서 경찰이었는데 외할아버지가 경찰서를 드나들면서 사위를 삼았지요. 외할아버지는 해방 후에 일본에서 돌아온 가난한 사람들을 거둬 먹일만큼 훌륭한 분이었어요. 외가가 덕유산 자락인데 덕유산에 그때 (남로당) 박헌영이 있었어요. 박헌영이 와서 외할아버지한테 같이 '사업'을 하자고 했대요. 외할아버지가 '나는 종손이라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더니 민가에 불을 내고는 외할아버지한테 덤터기를 씌우고 경찰에 끌려가면 또 좌익과 가깝다고 의심을 받고. 여기 저기서 맞아서 성할 새가 없었다고 해요. 그러다가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괜찮다고 해서 가입했을 텐데 결국에는 그 때문에 돌아가셨지요."

_사위가 경찰인데도 장인을 구할 수 없었나봐요.

"그렇죠. 아버지는 71년에 경찰을 그만 두고 부산으로 가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사기를 당해서 1년만에 완전히 망했어요. 알코올중독에 폐인이 됐고 경남 김해에 있는 작은 할아버지의 집을 얻어서 살면서 엄마가 행상을 하면서 6남매를 먹여 살렸어요. 거기는 거창 산골하고 또다른 시골이잖아요. 김해평야 좍 펼쳐지고 낙동강 중류쯤에. 그때 저는 초등학교 2학년인데도 엄마가 너무 불쌍해서 엄마를 도와야겠다고 안 해 본 일이 없어요. 밤에 실고추를 썰어 팔면 30원이에요. 쑥캐서 팔아도 30원. 김해에 부추밭이 많았는데 그거 한 고랑 메주면 110원인가, 그거 두 고랑 메면 육성회비가 나왔어요. 열 살까지 외할머니 품안에서 가사만 듣고 사랑받고 크다가 그러니까 어린 애가 얼마나 가슴 속에 맺힌 게 많았겠어요? 거창에서는 상여가 나간다거나 동네 잔치가 있다거가 혼인을 하면 전통 그대로 했어요. 김해 가니까 낙동강에 사람들이 많이 빠져 죽으니까 굿을 해요. 배가 가는데 무당들이 춤추고 징치고 그러니까 너무 멋있어서 마구 따라다녔어요. 시골에 할아버지들이 모이면 향제 시조를 하는 데가 있었어요. 학교 갔다 오면 거기 가서 들어요. 그걸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거예요. 어렸을 때 외할머니가 맨날 가사를 읽어줬으니까 다 들어본 소리잖아요. 이사는 몇 번을 다녔지요. 초등학교 5학년 때는 다시 부산으로 갔지만 일요일이면 꼭 김해로 갔어요. 그때 라디오를 들으면 화요일 저녁 8시인가 민요백일장이라고 전국노래자랑처럼 민요대회 같은 게 있었어요. 안비취 이은관 김소희 선생님 같은 분들이 심사위원으로 나오니까 나는 커서 꼭 저 분들을 찾아가서 소리를 해야겠다 결심했지요."

-그래서 소리 공부하러 서울 올라왔어요?

"제가 중학교 때 무료로 가르쳐주는 국악고가 생겼는데 거기도 다닐 수 없을 만큼 가난했어요. 아버지는 완전 폐인이고 엄마는 교통사고가 두 번이 나고 형은 연좌제로 공무원이 못 되는 것도 모르고 고시공부한다고 있지. 수영에 블록 찍는 공장이 있는데 거기 블록 쌓아서 천막 치고 살았으니까요. 저라도 돈을 벌어야겠다 싶어서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때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어요. 돈을 벌면 소리공부도 하려고 했어요. 80년인가봐요."

_그런데 왜 소리공부는 84년까지 못했어요?

"화곡동에 있는 작은 고모댁에 왔는데 거기는 떡장사를 해요. 고모 혼자 새벽 네시까지 떡을 만드는데 제가 쉴 수가 없잖아요. 팥 삶으라 팥 삶고 쑥 쪄라 쑥 찌고 빨래 나오면 다 삶아서 빨고. 제가 뭐든 빨리 배우고 손이 빨라요. 그런데 떡장사 하려고 서울 올라온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옥수동 사는 작은 삼촌네에 갔더니 옆집 누나랑 결혼할 사람이 마장동 도축장에서 일 한다고 거기를 소개해줬어요. 거기서 뼈와 고기를 부위별로 분리하면 소 한 마리가 8,000원 돼지 한 마리가 2,000원 받을 때였어요. 그 도축장이 전국 호텔 납품도 하는 엄청 큰 사업이었어요. 소 잡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국민학교 졸업이었어요. 저는 영어도 좀 한다고 호텔 납품을 맡으래요. 그래서 신라호텔도 가고 한국의집도 갔는데 한국의집에 가니까 국악공연을 하지, 궁중요리도 나오지. 도축장에서 일하면서 제가 검정고시 학원도 다니고 판소리 학원도 다니고 라디오나 테이프를 들으면서 소리도 계속 독학을 할 때라 거기 주방장한테 부탁을 했어요. 내가 떡도 잘빚고 고기도 잘 아니까 좀 써달라고. 여기는 자격증 못 따면 못 들어와. 그래서 자격증 따면 써주실래요, 그랬더니 그런대요. 그래서 도축장을 나와서 신길동에 있는 왕준연 요리학원을 찾아서 갔어요. 먹여주고 재워주고 일 하면 돈도 벌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8개월 만에 한식 양식 자격증을 땄어요. 자격증 따서 한국의집 갔더니 막 웃는 거에요. 너는 그 말을 진짜로 믿니. 요리학원 다닐 때 알게 된 분의 카페에서 일하고 있는데 고모집으로 영장이 나왔나 봐요. 사흘 뒤에야 갔더니 수배자가 되어서 병무청에 가서 설명을 하래요. 그때 제가 창도 잘하고 궁중요리도 한다고 했는데 하필 그때 특전사 취사병이 장보러 나와서 시장 장인들한테 술대접을 받고는 제 때 들어가지 않는 바람에 탈영이 됐나봐요. 그래서 특전사 취사병이 된 거에요. 식구가 50명도 안되니까 사복입고 머리 기르고 지프차 타고 가면 헌병들이 인사하고. 낮이면 송파부터 성남까지 가로수길이라 걸으면서 소리 연습하고 그러다 선생님을 만난 겁니다."

_내력을 듣고 보니 수심가에 꽂힌 이유를 알겠네요.

"제가 어려서부터 처절한 걸 좋아했어요. 판소리를 하면 이도령보다 심봉사가 좋았어요. 판소리를 하면 막 격정적이 되는데 이런 나를 딱 눌러주는 것은 쳅뗄늅楮? 그런데 서도소리는 이 두 개를 합쳐놓은 것이거든요. 특히 수심가는 내지르면서 참는 거에요.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면서 관서지방 사람들한테 벼슬을 안 줬다나요. 그래서 몰락한 선비들이 기생집을 찾아서 이런 노래를 만들게 한 거지요. 판소리처럼 지르고 싶지만 양반이니까 자제를 하면서 적당히 지르는 게 요즘 말로 풀면 '허무와 원망의 소리'지요. 다행히 저랑 목소리가 맞기도 했고요. 서도소리는 목소리를 꺾고 떨고 시김새라는 꾸밈음이 굉장히 많아요. 목이 타고 나지 않으면 안돼요. 다들 그런 요성을 못 내니까 요즘은 단순하게들 하는데 옛날 선생님들 음반을 들어보면 그렇지 않아요. 제대로 해야지요."

_한복은 또 언제 배웠어요?

"선생님 돌아가시고 임이조 선생님하네 무용을 배웠는데 공연을 하는데 의상비가 60만원이래요. 한 달 생활비가 25만원이었으니 그걸 댈 수가 없잖아요. 팸플릿에 이름이 나갔는데도 공연을 못했어요. 그래서 종로5가에 한복을 배우러 다녔어요. 어려서부터 외할머니 쪽도 다 쪄주고 집에서 보고 배운 게 있으니까 금방 늘었어요. 선생님 돌아가시고 이북오도청 평안남도예술단 대표를 3년간 제가 했는데 그때 불려갈 때마다 예술단원들 옷을 제가 다 만들었어요. 옷때깔이 하도 좋아서 저희집이 부자집이라는 소문이 났지요."

_소리만 하기에는 재주가 많지만 그래도 소리만 하지 않는 게 아깝기도 하네요.

"국악도 연극처럼 외부 지원을 받아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자기 힘으로 살아내게 하고 싶어요. 여기(가례헌)에서 후배들이 와서 옷도 제대로 입히고 제대로 공연하면 6개월만에 실력이 부쩍 늘거든요."

서화숙선임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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