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가 도발한 시민의 '멘붕'

2012. 5. 1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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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표지이야기] 진보정당 지지하는 평범한 시민과 노동자 처지에서 본통합진보당 선거부정 사태와 기막힌 수습책… 관습'으로 곪아온 고질병 만천하에 터져도,"부정의 주체는 비당권파" 우기는 당권파의 적반하장

"정치인으로서가 아닌 시민의 입장으로, 평범한 노동자의 입장에서 이 사태를 바라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진상조사위원회가 "총체적인 부실·부정"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 다음날인 5월3일 열린 공동대표단 회의에서 이정희 대표가 한 말이다. 그는 "온라인투표의 안전성을 확실히 보장하지 못해 우려를 드린 점, 부정투표가 이루어질 환경을 만들어낸 현장투표의 관리 부실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고도 했다. 이날 오후 당 누리집에 공개된 진상조사보고서는 충격적이었다. 유령당원 투표까지 드러났다. 선거 시스템과 관리는 부실했고, 뭉텅이 투표용지와 대리투표, 무효표의 유효 처리 등 다양한 부정투표가 발견됐다.

"표를 버렸다" 생각하는 지지자

그러나 이 대표의 태도는 하루 만에 '초강경 모드'로 돌변했다. 5월4일 전국운영위원회 모두발언에서 그는 "편파적이고 부실한 진상 조사"라며 조사 결과를 정면 부정했다. "불신에 기초한 의혹만 내세울 뿐 합리적 추론도 초보적인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조사 방식"인데다 "진보정치에 십수 년 몸 바쳐온 귀한 당원들을, 현장투표소를 운영하기 위해 노력한 아까운 당원들을, 책상머리에서 부정행위자로 내몰았다"고, 오히려 진상조사위를 비난했다. 6월4일로 예정된 당 대표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겠지만, 당분간 대표직은 유지하겠다고 했다. 이 대표는 특히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때마다 사실관계를 밝히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희생양'이 필요한 때라는 답변만 들었다"며 비당권파를 맹비난했다.

그는 부실과 부정을 구별했다. 부실에 대해서는 사죄하지만, 선거 부정은 인정할 수 없다는 식이다. 부실의 결과가 당락에 영향을 끼친 게 아니어서 문제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지난 4월 총선 때 자신이 나섰던 서울 관악을 야권 단일후보 여론조사 조작 사건 때 "선거 결과에 영향을 끼칠 수준이 아니"라고 했던 전례를 떠올리게 한다.

이 대표의 발언을 굳은 표정으로 듣던 유시민 대표는 "부정이냐 부실이냐를 떠나 우리 당의 비례대표 경선은 민주주의 일반 원칙과 상식에 어긋났다. 당 내부에서 국회의원 후보를 선출하는 결과가 최소한의 투명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무엇을 근거로 신뢰성을 주장할 수 있느냐"고 꼬집었다.

통합 넉 달여 만에 통합진보당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선거 부정·부실을 '관례'로 치부하고, 민주주의의 상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당권파 탓이다. 진보정당을 역사상 최악의 위기에 빠트리고 있는 사람은 '시민과 평범한 노동자의 입장'에서 이 사태를 바라보지 못하는 이정희 대표다.

통합진보당의 정당득표율은 10.3%였다. 강선희(37·연구원)씨도 10.3%에 해당한다. 강씨는 4월11일 기표소에서 기표용구를 들고 한참을 망설였다. 4번(통합진보당)을 찍을까, 16번(진보신당)을 찍을까. 2004년 이후 총선 때마다 '정당투표는 진보정당'을 선택해온 강씨는 '몰아주자'는 마음에 4번을 찍었다. "진보정당은 민주당처럼 상황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옳다고 생각하면 밀고 나가지 않나. 무상급식도 진보정당이 오랫동안 밀어붙여서 해결을 본 거고."

경선 부정 소식을 접한 뒤 강씨는 "표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배신감이 크다. 단순한 정치조직도 이런 상황이면 문제가 될 텐데, 정당을 표방하면서 이러니 황당하기까지 하다. 새누리당도 이렇게는 안 하지 않나? 진보정당이 그동안 온라인투표를 해온 건 최대한 민주적인 방식을 도입한 거라고 알고 있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지…." 서울 관악구에 사는 강씨는 "연달아 부정사건이 터져 충격이 더 크다. 완전 자해"라고 말했다. "진보세력 전체가 욕을 먹을까 걱정된다. 13석이나 얻었는데 통합진보당은 정당이 뭔지 모르나?"

부정을 부인하거나 화살을 돌리거나

박수혁(40·학원강사·광주 광산구)씨는 "너무 열받고 쪽팔려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닌다"고 말했다. 박씨는 그동안 "먹고살기 팍팍하고 MB한테 불만이 많지만 투표는 안 하는" 주변인들을 열심히 설득했다. 지역구는 어차피 민주통합당 후보가 당선될 테니, 정당 투표는 진보정당에 힘을 보태주자고. 통합진보당의 경선 부정이 드러난 뒤 박씨는 '멘붕'(멘털 붕괴)에 빠졌다. 주변인들은 그에게 물었다. "정치적 대안세력이라고 하더니 이런 비정상적인 정당이 어떻게 대안이 될 수 있느냐?" 박씨는 "당권파니 경기동부연합이니 그런 게 문제가 아니다. 통합진보당은 집권이라는 화두에 목을 매면서부터 정책에 소홀하고, 의석 몇 개 얻는 데만 골몰하고 있는 것 같다. 벌어진 일도 충격이지만, 내부에서 싸우고들 있으니 더 충격"이라고 말했다.

지지자들은 진보정당의 존재 이유에 대해 회의하고 있었다. 국민의 대표를 뽑는 일에 공정성을 잃었다는 건, 정당의 존립 근거를 넘어 민주주의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참여연대는 5월2일 성명에서 "독재정권에서나 있을 법한 부정선거 행태가 진보정당에서 일어났다는 것에 분노와 허탈감을 감출 수 없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초등학교 반장 선거에서부터 각종 공직 선거까지 공정한 과정을 통한 대표자 선출은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린 약속이다. 진보당의 경선 부정은 국민적 신뢰 하락을 넘어 우리 사회 민주주의 토대를 뒤흔드는 사안"이라고 비판했다.

어쩌다 이런 지경이 된 것일까. 당권파는 애초부터 조사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5월2일 조준호 진상조사위원장이 조사 결과를 발표한 지 4시간 뒤 당권파의 핵심인 이의엽 정책위원장은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부정선거라고 할 수 없다"고 반박했고, "부정의 주체는 비당권파"라는 주장으로 나아갔다. 당권파인 김승교 당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은 이날 라디오 인터뷰에 출연해 "저희가 파악하고 있기로 확인된 것은 비당권파 후보들의 부정이다. 부정은 비당권파가 저질렀는데 책임은 당권파가 지라는 것이냐"고 말했다. "이 일은 누가 했든, 어떤 목적으로 했든, 계획적으로 했든, 깊은 생각 없이 했든, 국민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 당이 한 일이다. 그래서 어떤 행위를 한 당원 개개인의 책임을 논하기 전에 하나의 정당으로서 국민 앞에 분명하게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유시민 대표 등 비당권파의 인식과는 전혀 달랐다.

상황 인식이 다르니 수습책도 달랐다. 비당권파는 경선 자체의 신뢰성을 잃었으니 경선 비례대표 후보 14명 전원이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권파는 책임 소재의 연관성을 밝힌 뒤 연루자만 사퇴해야 한다고 맞섰다. 급기야 5월4일 오전 비례대표 1번 윤금순 당선인은 기자회견을 열어 경선 비례대표 후보 전원 사퇴를 촉구하며 사퇴 뜻을 밝혔다. 윤 당선인은 민주노동당 출신 가운데 비주류에 속한다. 비당권파는 이날 오후 4시에 소집된 전국운영위원회에 지도부 총사퇴, 비례후보 총사퇴 권고안을 안건으로 올렸다. 그러나 이정희 대표를 비롯한 당권파가 이를 거부해 갑론을박을 거듭했다.

문제의 핵심은 '당권파의 조직문화'

당권파가 여론의 집중 포화와 당이 쪼개질 위험을 무릅쓰고 강경한 태도로 돌아선 것은 '밀리면 끝장'이라는 위기감 때문으로 보인다. 당권파는 애초 당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타협책'을 모색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동부연합'으로 불리는 당권파의 핵심 인물로 꼽히는 이석기 비례대표 2번 당선인이 진상조사 결과 발표 사흘 전 유시민 대표를 만나 당권을 줄 테니 당 지분을 보장해 달라는 제안을 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진상조사 발표 뒤에는 이정희 대표가 유시민 대표에게 "열심히 도와드릴 테니 유 대표가 당 대표를 맡아 당을 이끌면서 당 운영 방식이나 구조를 혁신적으로 바꿔주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으나, 유 대표는 '당내 복잡하고 어지러운 사안을 수습할 자신이 없다'는 취지로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조사 결과를 그대로 수용할 경우 당권파의 당내 입지는 물론, 당권파 당선인(6명)들의 정치 행보도 큰 타격을 받게 된다. 특히 당권파는 검찰의 수사 착수에 상당한 위기의식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검찰 수사에서 부정의 실태가 밝혀질 경우 당내 조사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 된다. 이정희 대표는 "진상조사위가 온라인투표의 정당성과 신뢰성이 상실됐다고 발표한 이상, 당원들의 투표 내용은 이제 온전히 검찰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당권파는 진상조사위의 정치적 의도까지 의심하고 있다. 부정의 주체를 밝히지 못한 조사 결과를 내놓고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당권파에 책임을 물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지지 당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어서 구태여 부정을 저지를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내부 사정을 아는 이들은 '부정의 주체'로 '당권파의 조직문화'를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통합진보당의 한 당원(ID 코스모스핌)은 당 누리집 게시판에 "삼성의 노조 탄압은 구체적인 주체가 드러났나? 삼성의 노조 탄압은 오너식 경영과 잘못된 경영 이념, 이를 집행하는 관리자들의 총체적인 비양심이다. 주체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조직 단위로 시스템으로 행해지는 집단범죄"이기 때문이라는 글을 올렸다.

"터질 게 터진 것"이라는 반응은 그래서 나온다. 당권파가 '관행'이라고 불러온 고질병이 만천하에 공개된 것일 뿐, 새삼스럽거나 전혀 예상 밖의 사건은 아니라는 얘기다. 분당 전 민주노동당 시절인 2001~2002년 '서울 용산지구당 장악 사건' 등 민주주의의 원칙과 상식을 무시하는 행위는 심심치 않게 불거졌다. 당내 다수파였던 자주파(NL)는 서울 용산지구당을 창당하려는 평등파(PD)를 누르려고 위장전입, 당비 대납 등을 서슴지 않았다. 지난 10여 년 동안 당 운영을 책임지는 사무총장은 모두 자주파에서 배출됐다. 2008년 분당 사태는 '승자독식'에 몰두한 당권파(자주파)의 패권주의적 당 운영에서 비롯됐다. 지난 4월 서울 관악을 야권 단일후보 경선 조작도 당권파가 저지른 일이다. 목표를 이룰 수 있다면 비민주적인 방법도 괜찮다고 여기는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은 까닭이다.

"불의는 못 참지만 불합리는 못 느껴"

더 큰 문제는 '불감증'이다. 김승교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5일 동안 현장투표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생업을 팽개치고 앉아 있는데 국가 선관위처럼 엄정하게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가 선관위 눈높이에서 바라보면 안 된다. 정당이나 단체가 하는 것은 다 부족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자신들의 잘못된 관행이 민주주의에 어긋난다는 위기 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무능의 고백에 다름없다. 정당을 일반 단체와 구분하지 못하는 대목은 황당하기까지 하다. 한 핵심 당직자는 당권파를 "불의는 못 참는다고 얘기하면서 불합리는 못 느끼는 조직"이라고 표현했다. 국민참여당계인 천호선 대변인은 "선거의 엄정성을 깨닫지 못하고 소홀하고 안이하게 본 무책임한 태도가 투표 관리자로 하여금 마음만 먹으면 쉽게 부정투표를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라며 "근본적으로는 기본을 무시해온 일부 당 간부들의 안이함, 도덕불감증이 문제"라고 말했다.

이런 고질병이 그동안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뭘까. 진중권 동양대 교수 5월2일 트위터에 "과거에도 이런 일은 있었지요. 정파들이 이해를 적당히 조절하는 선에서 봉합하고 본질적 문제를 덮어온 것이 화를 키운 거죠"라고 썼다. 주류 언론들은 그동안 '소수정당의 당내 싸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외부의 감시가 없었던 셈이다. 더구나 2008년 분당으로 당내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는 세력이 사라졌다. 내부 견제와 경쟁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제대로 드러내 치료하지 않고 키워온 고질병의 환부가 급기야 국회의원 후보를 뽑는 선거에서 까발려진 셈이다.

환부가 드러나는 과정은 역설적이기까지 하다. 민주노동당은 정체성 훼손 논란에도 '대중적 진보정당'을 표방하며 국민참여당과 손잡았다. 두 당 모두 진성당원제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 양쪽의 결합을 촉진했다. 절차적 민주주의, 당원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국민참여당계가 경선 부정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온 당권파와 정면 충돌하게 된 셈이다. 당 누리집 게시판에 처음으로 부정 의혹을 제기한 이청호 부산 금정구 의원도 국민참여당 출신이다. 그러나 유시민 대표와 탈당했다가 다시 돌아온 심상정 대표도 결과적으로 이런 관행을 '방조'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선거를 앞두고 급조된 통합진보당에서는 당내 지역구 경선 과정에서부터 여러 부정·부실 의혹이 불거졌지만, 각 정파들이 자기 후보를 공직에 진출시키려는 권력투쟁을 하느라 문제를 다 덮고 왔다. 진보정당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내부 조직 정비 등을 하지 못한 채 선거부터 치르고 보자는 식이었다.

"헛된 희망으로 더 큰 좌절 느낄까 두렵다"

통합진보당 사태의 조기 수습은 어려워 보인다. 어떻게 하든 수습은 그들의 몫이고, 평가는 유권자가 할 것이다. 통합진보당 지지자인 김상용(51·회사원)씨는 이렇게 말했다. "2004년 첫 원내 진입 때의 환호를 지금도 기억한다. 이번 경선 부정은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악습이 고름처럼 모여 있다가 터진 거다. 당이 대중화 단계에 들어선 만큼 이참에 확실히 털어내고 가야 한다. 이 고비를 넘으면 진보 진영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 수 있겠지만, 못 넘어가면 지지를 철회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에 대한 대중의 요구와 희망을 감당할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명백히 드러나는 게 좋다. 헛된 희망을 가졌다가 더 큰 좌절을 느끼고 싶지 않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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