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못가는 2살 라라, 어린이집 쫓겨난 4살 이삭

입력 2012. 4. 16. 19:10 수정 2012. 4. 16.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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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기지촌 미등록이주민 아이들 '인권 사각'

동두천에만 100여명 추산 의료·교육혜택 전혀 못받아

90년대부터 연예인비자 입국 필리핀 국적 엄마가 대부분

미군·국가에 2번 버림받은셈

라라(가명·2)가 계속 기침을 하자 페니(가명·26)는 감기인 줄 알고 약을 사다 먹였다. 하지만 다음날 아이의 입술이 보라색이 될 정도로 심하게 기침을 하고 열이 나자 놀란 페니는 딸을 병원에 데리고 갔다. 의사는 '백일해'라며 큰 병원으로 옮길 것을 권했다. 라라는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종합병원에서 4일간 입원 치료를 받고서야 병세가 나아졌지만 병원비가 문제였다. 건강보험을 적용받지 못하는 미등록 이주민인 모녀에게 병원비 150만원은 큰돈이었다. 병원비 일부는 기지촌 지역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았지만 대부분은 그동안 모아 둔 돈을 털고 친구들에게 빌려 충당했다.

필리핀인 페니는 2009년 가수를 시켜주겠다는 한국 기획사를 통해 연예인 비자(E-6)를 받아 한국에 왔다. 그는 경기도 동두천에 있는 한 클럽에서 일한 지 1년쯤 지났을 때, 한 미군 병사와 동거하면서 임신했다. 업주는 임신한 페니를 등록사업장인 클럽에서 쫓아내, 페니는 미등록 이주민이 됐다. 2011년 여름, 라라가 태어났다. 남자친구는 "클럽에서 일한 여자가 낳은 아이인데 내 아이인 줄 어떻게 아느냐"며 모녀를 두고 미국으로 도망갔다. 미국 시민권을 얻지 못한 라라도 엄마처럼 미등록 이주민이 됐다.

의정부에 있는 기지촌 여성상담센터 두레방의 한 활동가는 "페니가 클럽·레스토랑을 전전하며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두레방을 찾아올 때마다 '생활비가 모자라 아이 키우기가 어렵다'고 하소연을 한다"고 전했다. 이 활동가는 "자녀와 함께 생활하는 미등록 이주여성은 특히 아이 병원비 때문에 곤란을 겪는 사례가 많다"며 "한 미등록 이주여성의 경우 조산을 해 아이 입원비가 3천만원이나 나왔다"고 말했다.

미등록 이주민 자녀들은 의료뿐 아니라 교육 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몽골인 엄마 사라(가명·37)는 네살짜리 아들 이삭(가명)의 말을 알아듣기 힘들 때가 많다. 이삭은 엄마가 쓰는 몽골어, 엄마의 미군 남자친구가 쓰는 영어, 함께 사는 필리핀 클럽 여성이 쓰는 필리핀어에 모두 노출돼 있다. 사라는 "아들이 4개국어를 한꺼번에 듣고 자라니 제대로 할 줄 아는 말이 없다"며 "선생님에게 배우면 좀 나아질 것 같은데…"라고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사라는 2007년 한국에 와 서울 이태원 클럽에서 만난 미군과 동거를 하며 아들을 낳았지만, 미군은 모자를 버리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삭은 단속 때문에 제대로 밖에 돌아다니지도 못해 친구도 같은 미등록 이주민 아이 두 명밖에 없다. 사라는 "지난해 동두천시청과 어린이집 3군데를 찾아가 한국 어린이집에 다니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모두 '부모가 한국인이 아니다'라며 거절했다"고 말했다.

외국인 여성들이 기지촌 주변 클럽에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1996년부터다. 클럽 주인들의 모임인 한국특수관광업협회가 한국 여성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외국인 여성으로 채울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고, 정부는 협회에 '외국인 연예인'을 초청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다. 이후 가수를 시켜준다는 연예기획사의 꼬임에 연예인 비자로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여성들이 보내진 곳은 기지촌 주변의 클럽이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신분 상승을 이루겠다는 생각에 미군과의 결혼을 기대하고 동거를 했다. 하지만 미군들 대부분은 처자를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고, 남겨진 엄마와 아이는 미등록 이주민이 됐다.

현재 미등록 이주민 자녀들은 그 규모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두레방은 지난해 여름 동두천시 보산동을 조사해 취학 전 미등록 이주민 자녀가 50명가량 거주하는 것을 확인했다. 두레방 관계자는 "동두천시 전체에 100명가량의 미등록 이주민 아이들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경기도 평택·송탄 등 동두천만큼 역사가 길지 않은 기지촌에선 이 정도의 기초조사도 진행되지 않았다. 기지촌 여성들의 주된 유형인 연예인 비자(호텔유흥, E-6-2) 취득자 중 미등록 이주여성은 지난 1월 기준으로 1232명(필리핀 국적 1160명)에 이른다.

동두천/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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