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 노트]'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라디오헤드'의 읊조림
트랙 #2=Radiohead 'Punchdrunk Lovesick Singalong'
[동아일보]
영국의 5인조 밴드 라디오헤드. 동아일보DB |
"우리, 오늘 저녁에 있었던 일 다 잊는 걸로 하자. 우린 친구잖아. 친한 친구, 제일 친한 친구."
그해 가을이 가고 있었다. 나는 그날 저녁 고작 맥주 한 병의 취기에 기대 어렵게 용기를 냈으며 맞은편에 앉은 그녀 'J'에게 고백했고 보기 좋게 차였다. J는 과 동기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아주 예쁘진 않았지만 밝고 쾌활한 작은 아이였다. 그녀를 위해 몇 날 며칠 좋은 노래들을 녹음해 카세트테이프에 담아 건네기도 했다.
"너는 베스트 프렌드"라는 J의 지독히도 상냥한 거절을 듣고 나는 혼자서 술을 몇 잔 더 마신 뒤 다음 날로 고향집에 내려갔다. 일주일 동안 내 이름 세 글자는 강의실에서 답 없이 호명됐다. '불문학개론(2)'를 듣던 계절은 그렇게 지나갔다.
기숙사로 올라가는 긴 길에서는 가로수들의 초록이 밤의 캔버스를 간질였다. 흔들렸다. 취한 내 발걸음도, 세계 전부도 아주 조금씩 천천히. 그런 밤이면 내 귀에는 늘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캠퍼스를 메운 공백은 그 음악 하나로 채워지고 공명했으며 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했다.
'펀치드렁크 러브식 싱얼롱'은 1994년에 발표된 라디오헤드의 미니앨범 '마이 아이언 렁'의 네 번째 트랙이다. 몽롱하게 울리는 전자기타의 분산화음은 트레몰로로 명멸하는 비극적인 멜로디를 끌고 나온다. 톰 요크의 보컬은 나른하게 읊조린다. "아름다운 소녀는 당신의 세계를 먼지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어."
다른 여름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올여름 록 페스티벌에 갈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라이브 공연에서 연주한 적이 없는 '펀치드렁크 러브식 싱얼롱'을 결코 들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처음 한국을 찾는 라디오헤드의 음악은 경기 이천의 산과 공기를 맴돌다 내 귓속으로 들어와 또 어떤 기억을 불러낼 것이다.
어제, 영화 '건축학 개론'을 봤다.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작은 극장 안을 가득 채울 때 언젠가 우리에게도 개론 수업을 듣던 날들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뜻 모를 눈물도 흘렀다.
우리가 들고 있던 그 설계도는 10년 뒤 어떤 노래가 돼 빛바랜 박스에 담겼나.
이봐, 노트. 그리고 나는 누구의 첫사랑이었을까.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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