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시신처리 담당..北교화소 한달에 100명씩 죽어나갔다"

안호균 2012. 3. 16.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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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이수복(가명)씨 인권실태 증언

【서울=뉴시스】안호균 기자 = "죽으란 소리다. 먹이는건 고양이밥을 먹이고 일 시키는 것은 황소일을 시키니까 도저히 버텨낼 수 없었다."

2000년 초 북한 전거리 교화소(교도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며 사망한 제소자들의 시신 처리 업무를 담당했던 북한이탈주민 이수복(가명)씨는 교화소 내 인권 실태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15일 열린 국가인권위원회 북한인권침해 신고센터 1주년 보고회에 참석한 북한이탈주민들은 자신이 교화소에 복역하면서 겪은 참혹한 인권실태에 대해 증언했다.

이씨는 자신이 '시체처리반'으로 있던 2000년 6월부터 2001년 1월까지 모두 850여구의 시신을 처리했으며 시신은 '불망산'에서 모두 태웠다고 밝혔다. 당시 전거리 교화소의 수용 규모가 800명 정도였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숫자다.

인권위가 북한이탈주민을 상대로 교화소 내 식량 배급 실태에 대해 조사한 결과 당시 가장 식사량이 많은 1급(탄광노역자, 벌목반 등)의 경우 한 끼에 모래가 섞인 옥수수밥을 120g가량 배급받았다고 한다.

이씨는 "내가 입소했을 때가 가장 식량 사정이 열악하던 때였다"며 "굶주림을 참다 못해 독풀을 먹다 죽기도 하고, 음료수가 없어 갱에서 흘러나오는 폐수를 먹고 죽기도 했다"고 말했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 전거리교화소에 복역하며 행정 업무를 담당했던 임정진(가명)씨는 당시 매월 평균 80∼1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임씨는 "수형자들은 먹지 못해 질병에 약하다. 특히 파라티푸스에 걸려 사망한 경우가 많았고 강한 육체노동을 이기지 못해 사망한 사람도 많았다"고 회고했다.

2007년 말부터 2010년 초까지 전거리교화소에 수감됐던 이숙향(가명·여)씨는 비교적 최근의 교화소 실태에 대해 증언했다.

이씨는 '고난의 행군' 시기보다 사정이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한 달에 70∼80명의 수감자가 사망했다고 전했다. 식사량은 한 끼에 옥수수, 콩, 모래가 섞인 밥 140g정도였다고 했다.

지난 1년간 북한이탈주민들의 신고 내용을 토대로 북한 인권 침해 현황을 조사한 김태훈 북한인권특별위원회 위원장은 "그 동안 정치범 수용소나 보위부(정보 기관)에 비해 교화소 내 인권 실태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사실 북한 주민들이 대량 살육을 당하는 곳이 바로 교화소다"고 설명했다.

이날 보고회에서는 중국에서 강제 북송된 북한 이탈주민들이 겪는 인권 침해에 대한 증언도 나왔다.

탈북을 시도하다 2003년 중국에서 강제 북송됐던 이순실(가명·여)씨는 보위부가 중국에서 돌아온 임산부들의 배에 낙태주사를 했다고 폭로했다.

이씨는 "중국으로 가서 아이를 임신해 온 여성들은 중국 종자를 받아왔다고 (보위부가) 낙태를 시켰다"며 "피부 소독제인 라바놀을 0.75%로 희석해 태아의 머리에 20cc를 주사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어떤 아기들은 죽어서 나오고 5∼6개월 된 아기들은 살아서도 나온다"며 "살아 나온 아기들은 신문지로 싸서 복도에 놔뒀다가 울음이 끊길 때 처리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조사 과정에서 보위부 직원이 뜨겁게 달군 불쏘시개로 자신의 흉부를 지지고 끓는 물을 뒷목에 부어 화상을 입었다는 증언도 했다.

ahk@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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