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ㆍ이백의 詩가 '퓨전 문인화'로 부활하다
화폭 위로 싼칭산, 후커우폭포, 난찬시, 우이구곡계의 절경이 둥실 떠 있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호수가 산색에 젖어 녹색 물결로 일렁이고 높은 하늘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 파랗다. 붓이 지나간 자리마다 기묘한 산봉우리와 산야가 그려져 있다. 화선지 위의 감칠맛나는 필체는 예나 지금이나 문인화의 묘미다.

중국 문인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대만 화가 정짜이동(59)이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 현대 강남점(아트타워)에서 국내 첫 개인전을 펼치고 있다.

상하이와 타이베이를 오가며 활동하는 그는 빠르고 강한 필체로 이백 백거이 두보 등 옛 문인들의 시구 속 절경을 그려왔다. 1980년대에는 동양적 정신의 화풍에 서구의 현대적 조형을 융합한 ‘모던 산수(일명 퓨전 문인화)’라는 새로운 화풍을 개척했다.

중국의 정치·경제적 혼란기인 1989년 중국 본토로 이주한 그는 ‘옛것 그 자체’를 화면에 되살려내려 고대 절경에 주목했다.

“제가 추구한 전통적 절경의 미감을 문인화법으로 되살리기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백 두보 등 옛 문인들이 읊은 시구 속의 절경을 찾아가 그들의 감성과 태도를 되짚기 시작한 거죠.”

그는 문인화의 기본 지침인 기운생동(氣韻生動·멋) 골법용필(骨法用筆·필력) 응물사형(應物寫形·사생) 수류부채(隨類賦彩·채색) 경영위치(經營位置·구도) 전모이사(傳模移寫·모방과 창작)를 따르면서 먹 대신 서양 재료인 아크릴을 활용해 자연의 이미지를 그렸다.

그의 그림 속에서는 중국 명소들이 강렬한 색채로 되살아나며 때로는 낯설게 다가온다. 옥색과 선홍색의 색감 대비, 뿌연 안개에 휩싸인 산세도 신비롭다.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의 유명한 시 ‘친구와 함께 선산을 오르며’에서 ‘역사는 그 옛것을 풍경 안에 남겨 놓는다/나는 그것들을 보기 위해 다시 산을 오른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거기에서 제 작품 ‘강산절경’ 시리즈가 태어났습니다. 옛 선인과 나눈 대화의 기록인 셈이죠.”

그의 그림은 현대인의 고뇌와 옛 정신의 결합을 보여준다. 소재는 옛사람들이 노래한 자연 풍경이지만 그 안에 오늘의 현주소와 사람들의 갈등을 녹여냈기 때문이다.

“저는 와인과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며 많은 현대인들과 같은 내적 갈등을 품고 살아갑니다. 제 작품이 진짜 전통 중국 문인화는 아닙니다. 옛 대가의 시 제목과 내용을 빌려올 뿐이죠.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아픔과 잠재의식 속의 알 수 없는 공허함 고상함 나른함을 화면에 풀어내고 싶었어요.”

그가 그려낸 자연은 엽서 속의 풍경이 아니라 마법에 걸린 것처럼 몽환적이고 생생하다. 투박한 잎사귀와 나뭇가지가 얼기설기 얽혀 있고, 굵고 단단한 필선으로 그려진 돌들은 초록색 파도 사이에 놓여 있다. 붓 끝이 갈라질 새도 없이 꺾어지는 선은 커다란 팔의 동작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1970년대만 해도 철학이 확고하지 않았지만 회갑을 앞둔 지금은 어느 정도 미학적인 개념이 잡히는 것 같습니다.”

내달 4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에서는 황허, 양쯔강, 우이산 등 중국의 대표적인 자연 경관을 그린 대작 14점을 만날 수 있다. (02)519-080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