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말에서 성희롱까지, 고3 알바는 고달프다

허은선 기자 입력 2012. 1. 11. 10:14 수정 2012. 1. 11.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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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보던 얼굴이다. 출근길 커피 전문점에서 카페라테를 만들어준 알바생도, 컵라면에 바코드 리더기를 갖다 댄 편의점 알바생도 손놀림이 서투르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끝나고 쏟아져 나온 아르바이트 학생이다. 구인·구직 사이트 '알바몬'에 따르면 최근 한 달 동안 고3 이력서가 16배나 늘었다. 10월10일∼11월9일 고3에 해당하는 1993년 3월1일생∼1994년 2월28일생 알바몬 회원이 등록한 이력서는 총 1993건. 그러나 수능이 치러진 11월10일 저녁부터 등록이 급증해 12월9일까지 무려 3만2101건이 올라왔다. 과외 알바를 제외하고 고3 대부분은 저임금 단순직으로 알바를 시작한다.

알바를 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구인·구직 사이트 '알바천국'이 수능을 앞둔 고3 수험생 56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용돈 마련'이라는 응답이 61.6%로 압도적 1위였다. '사회 경험을 쌓고 싶어서'가 17.6%로 2위였고, '생활비 마련'은 11.3%였다. '학비 마련'이라는 응답은 6.8%로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러나 이는 등록금이 너무 올라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알바비로 등록금을 버는 일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 현실을 반영한다.

알바를 하는 고3이 경험하는 사회의 맨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네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야한 농담 하지 마세요"조개구이집 서빙 알바 박혜민

수시 1차로 서울 4년제 대학 사회학과에 합격한 인천여고 박혜민양(19)은 한 달 전부터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조개구이집에서 서빙 알바를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과외 알바를 권했다. 하지만 박씨는 "노동의 신성함을 몸으로 느끼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조우혜 김동규군(위)은 대형 소핑몰 야외 행사장에서 주6일 하루 11시간을 일한다.

생애 첫 알바는 만만치 않았다. 책상 앞에 앉아만 있던 수험 생활을 마치자마자 주5일 하루 8시간을 서 있으려니 다리가 저렸다. 무거운 음식 그릇을 나르고 설거지를 하니 안 쓰던 근육도 놀랐다. 알바 4일째에는 길바닥에 떨어진 은행잎이 조개로 보였다. 은행잎이 입을 벌리면 껍데기를 까야 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15번 테이블 가자'라는 가게 사모님 말을 잘못 알아들어 5번 테이블에 음식을 나른 적도 있다.

그래도 테이블을 오가며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 재미가 있다.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회식 자리에서 얼굴을 붉히는 직장 동료들, 돈 문제로 틀어진 관계를 소주 한잔 기울이며 풀어가는 남매, 인기 아이돌 그룹 멤버 이름을 꿰고 있는 아저씨 등 시시각각 색다른 손님이 가게를 찾는다. 부엌일을 맡은 아내에게 일한 만큼 보수를 주고 알바생의 건의 사항을 적극 수렴하는 사장님의 모습도 멋지다고 생각한다.

간혹 남성 손님이 야한 농담을 던질 때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가 '어린 학생이 못 알아듣잖아'라는 일행들 반응에 뒤늦게 알아채는 날이면 집에 가는 내내 속상하다.

"목표대로 등록금 벌 수 있을지…"의류매장 알바 김동규

김동규군(19)은 사실 수능 전부터 알바를 하고 있었다. 지난 4월 강남역의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알바를 시작했다. 대학에서 게임 디자인을 전공하고 싶은데 집안 사정이 어렵기 때문이다.

김군은 4시간 이상 일하면 나오는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곤 한다. 4만원짜리 소묘 교재를 사는 게 부담스러워 서점 바닥에 앉아서 진열된 책을 펼쳐놓고 그림 연습을 하기도 한다. 등록금을 벌어야 하는 김군은 또래에 비해 강도 높게 일하는 편이다. 한 달에 60시간 넘게 일해 주휴수당도 챙겼다. 하지만 소득이 없는 아버지 대신 집안에 생활비를 보태다보니 11월까지 35만원밖에 모으지 못했다.

ⓒ시사IN 조우혜 박혜민양(위)은 조개구이집에서 서빙 알바를 한다. 하루 8시간을 서서 일하고 손님들의 야한 농담에 얼굴을 붉히기도 한다.

고군분투하는 김군을 안타까워한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이 대형 쇼핑몰 야외 행사장 일을 소개해줬다. 11월18일부터 주6일 하루 11시간을 근무한다. 천장에 달린 적외선 난방기 두 대로 몸을 녹이며 하루 종일 홀로 서 있어야 한다. 옷을 도난당할까봐 화장실 가기도 망설여지고 손님이 많은 날은 오후 4시쯤 먹는 점심이 유일한 한 끼가 되기도 한다. 본사에서 들어오는 의류 상자를 창고에 나르는 것도 김씨 몫이다. 패딩 조끼는 가볍지만 기모가 들어간 티셔츠나 카디건 상자는 무거워서 어깨가 아프다. 시간을 정해두고 싼값에 옷을 파는 '타임 세일'과 소셜 커머스 반값 쿠폰은 공포의 대상이다. 손님들이 무섭게 몰려들기 때문이다. 12월15일에는 옷 17점을 분실했다. 알바비가 깎이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눈치가 많이 보인다.

12월23일 받은 첫 월급 120만원 중 102만원은 저축하고 18만원은 한 달치 식비와 교통비로 남겨두었다. 2월까지 쉬지 않고 일해도 합격 통지를 받은 IT 전문학교에 첫 학기 등록금 398만원을 완납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틈틈이 고사성어 외우면서 일해요"편의점 알바 함규

함규군(19)은 평일에는 서울 서대문, 주말에는 이태원의 편의점에서 하루 7시간을 일한다. 원래는 서빙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식당 대부분이 장기간 일할 수 있는 알바생을 선호하기 때문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3개월 단기 알바생을 자주 채용하는 편의점에 들어갔다.

함군은 대학에서 타이(태국)어를 전공하고 싶었지만 올해 원하는 점수가 나오지 않았다. 재수를 시작하기 전에 단기로라도 사회생활을 경험하고 싶어서 11월27일 알바를 시작했다. 공부에 대한 감을 잃지 않기 위해 손님이 없는 3~5분씩 틈을 타 언어영역 비문학 문제를 풀거나 손바닥 크기만 한 고사성어집을 들고 외운다.

괜한 시비를 거는 취객과 돈을 툭 던지며 담배 한 갑 달라는 무례한 손님을 상대하는 일에는 벌써 익숙해졌다. 가장 난감한 순간은 매대에서 물건 정리를 하는 도중 손님이 계산을 요청할 때이다. 결식 아동을 위해 시에서 발급하는 '꿈나무 카드'로 인스턴트 음식을 잔뜩 사가는 학생들의 모습도 처음 보았다.

밤 10시 정시 퇴근은 운이 좋아야 가능한 일이다. 다음 알바생에게 인수인계를 할 때 '영영이 안 나는(돈이 안 맞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함군은 첫 월급을 받자마자 어머니에게 빌린 차비 6만원을 갚고 논술 공부할 때 쓸 조그만 노트북을 사려 한다.

"의자는 넣고 가주시면 고맙겠습니다"PC방 알바 최준범

경북 상주에 사는 최준범군(19)은 12월13일 집 근처 PC방의 단골손님에서 알바생이 됐다. 친구가 그만둔 알바를 급하게 물려받았다. 주민등록등본 1통은 냈는데 사장이 근로계약서 이야기는 안 한다. 시급은 3700원이다. 최저임금에 대해 어렴풋이 들은 바 있어서 뭔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전에 일하던 친구도 그냥 넘어간 터라 사장에게 이의를 제기하기가 어렵다.

최군은 일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라고 했다. 알바 셋째날 밤 11시 퇴근을 앞두고 정산이 맞지 않아 20분 동안 계산기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PC방에서 한 시간 넘게 떨어진 거리에 사는 사장이 전화를 걸어와 "뭐가 문제여서 그러고 있냐"라고 물어보는 통에 깜짝 놀랐다. 전에 일하던 친구에게 뒤늦게 물어보고 나서 PC방 내에 CCTV가 설치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야동(야한 성인용 동영상)'을 본 아저씨 손님들이 남기고 간 흔적을 치우는 것도 곤혹스럽다.

손님일 때는 보이지 않던 노동자의 애로 사항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올 3월 대학생 신분으로 PC방을 찾으면 반드시 의자는 집어넣고 나가야겠다고 미리 다짐했다. 그것만으로도 알바생의 일손을 크게 덜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군은 2월 말까지 번 알바비를 대학 기숙사비로 쓸 생각이다.

허은선 기자 / alle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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