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와 머리카락을 같이 먹던 그대

탁현민 2011. 11. 18.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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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를 쓰는 오늘은 10월의 마지막 밤이다. 그대, 기억나는 10월의 마지막 밤이 있으신가? 아니면 그 남자처럼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시월의 마지막 밤 노래를 흥얼거리고 계신 건가. 그립다, 그대.

산다는 것은 어쩌면 기억을 추억으로 바꾸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생생한, 너무도 분명해서 펄떡펄떡 날것에 가까운 기억을, 시간에 재워 추억으로 만드는 것. 그래서 때로 어떤 기억들은 몹시 짜고, 시리고, 아프다. 오랫동안. 가을이어서, 10월의 마지막 밤이어서 그런 거야, 그대. 그러니 그대, 당신 탓이 아니다.

연애란 서로를 만나기 위해, 익숙해지는 연습을 하는 것 같지만, 그렇게 서로 익숙해지면 그때부터 서로를 지겨워하는 것이지 않았나 싶다. 어떻게든 그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집중하던 시간이 지나가고 그대가 내 생각을 읽으면 어쩌지 싶은 마음으로 지냈던 것 같다. 그렇게 낯설어서 끌리고 친밀해져서 시큰둥해졌던 그대.

헤어지기 전날 우리는 함께 카레를 먹었다. '아비꼬', 기억나는가, 그대? 잘 해감했던 바지락과 짭조름한 카레가 흰밥에 넉넉하게 덮여 나오던 그 집 말이야. 사실 그날도 특별할 것은 없었다. 그냥 익숙하게 서로가 원하는 음식을 주문하고, 토핑을 얹고 마주 앉아 먹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날 우리는 알았다. 함께 앉아 밥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설 때까지 단 한마디도 서로 나누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랬음에도 전혀 불편하거나 심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그 식사를 하는 동안 서로를 마주 보았던 순간은 단 한 번, 큰 소리로 '이랏샤이마세' 하던 식당 알바들이 그 소리에 끌려 들어온 일본 관광객에게 당황하고 관광객은 일본어로, 알바생은 영어로 주문을 받으려던 해프닝에서 잠시 '빵' 터졌을 때뿐이었다.

그 식당을 나오면서 우리는 그게 헤어지는 마지막 식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대, 우리는 몇 번 더 만날 수도 있었겠지, 혹은 아무렇지도 않게 좀 더 지낼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대도, 나도. '잘 가'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냥 손 한번 들었다 놓는 것으로 우리는 끝났다. 슬프지, 사랑이란 것, 참 하찮다.

카레와 머리카락을 같이 먹던 그대

그런데 그대, 알고 있었나? 그날 내가 먹던 카레에 바지락이 지금거렸고, 그대는 카레와 머리카락을 계속 같이 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게 무척 신경 쓰였다는 사실을….

밤에 써놓았던 원고는 여기까지다. 그 남자, 몹시 피곤한 관계로 간밤에 더 이상 쓰지 못했고, 자고 일어나니 이 다음을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지 무척 난감해진 상태다. 그 여자가 생각났고, 뭔가 쓰고 싶던 말이 있었을 것인데 아무리 행간을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경우 참으로 답답하다. 지우고 다시 쓰자니 저 몇 줄의 글이 몹시 애절해 아깝고, 그냥 이어 쓰자니 저 밤의 기분으로 돌아가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기억이란, 내가 원하면 불러내올 수 있는 것이고, 추억은 그것이 나를 불러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간밤에 추억은 왜 나를 호명했던 것일까? 추억의 호명에는 대개 단서가 있기 마련이지 않은가? 낮에 보았던 누구, 그대가 좋아했던 냄새, 혹은 10월의 마지막 밤 같은. 혹은 낮에 먹었던 그 카레 때문인가? '아비꼬' 그곳의 바지락 카레?

뭐 이런 생각, 이런 기분, 어쨌거나 오랜만이다. 내가 떠올릴 수 없는 추억이라면 또 언젠가 그대가 내게 왔듯이 추억이 나를 찾아올 것이니 그때 잊지 않고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뭐 그렇게 대충 정리하고 말자. 어차피 날은 밝았고 새날인데 지난밤을 붙잡고 있어봐야 어쩌랴! 그저 오늘 낮엔 그 여자와 헤어졌던 그 자리에서 지금거리는 바지락 카레나 먹을밖에.

탁현민(공연 기획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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