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 조성환 '비운의 FA 박정태' 전철밟나

2011. 9. 26.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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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안 김윤일 기자]롯데, 캡틴, 근성, 2루수, 개인보다는 팀.

이를 공통분모로 하는 단 2명의 선수가 있다. 바로 롯데의 레전드 박정태(42·롯데 2군 감독)와 지난해까지 롯데의 주장완장을 달았던 조성환(35)이 그 주인공이다.

조성환은 신인시절, 팀 내 최고의 스타이자 상징이었던 대선배 박정태의 룸메이트였다. 같은 2루수 포지션이었지만 주전 경쟁은 꿈도 못 꿀 정도로 하늘처럼 높은 선배였다. 그래도 그의 말 하나하나는 신인 조성환이 성장하는데 큰 자양분이 됐다. 물론 지금까지도 조성환의 멘토는 박정태뿐이다.

올 시즌이 끝난 뒤 조성환은 생애 첫 FA 자격을 취득하게 된다. 35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FA 대박은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의 멘토 박정태가 그러했던 것처럼.

◇ 롯데의 2루수 조성환(오른쪽)이 ´멘토´ 박정태처럼 FA 계약서 난항을 겪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 롯데 자이언츠

비운의 FA 박정태, 롯데에 대한 의리

박정태는 현역 시절, 롯데를 넘어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였다. 지난 6월 KBO가 발표한 '프로야구 30주년 레전드 올스타 베스트 10' 투표에서도 2루수 부문은 당연히 박정태의 자리였다.

1991년 롯데의 1차 지명을 받고 프로 무대에 뛰어든 박정태는 통산 5차례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1992년에는 타율 0.335 14홈런 79타점으로 롯데의 두 번째 우승을 이끌었고, 이때 기록한 43개의 2루타는 아직까지 한 시즌 최다 기록으로 남아있다.

박정태는 이듬해 경기 도중 발목뼈가 부서지는 심각한 부상으로 선수 생명의 위기를 겪게 된다. "정상적으로 걸을 수마저 없을 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진단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기의 의지를 불태운 박정태는 1995년 그라운드에 복귀했다. 그리고 1996년에는 앞으로 3번을 더 받게 될 황금장갑을 4년 만에 거머쥐었다.

1999년 삼성과 플레이오프 7차전 도중 "오늘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라는 한 마디는 박정태의 모든 것을 대변한다. 그는 배트를 잡았다 놓았다 설렁설렁한 타격폼과 달리 별명이 악바리였을 정도로 근성으로 똘똘 뭉친 선수였다. 결국, 롯데는 삼성에 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롯데팬들에게 박정태는 단순한 스타플레이어의 존재가 아니었다. 롯데의 상징이자 롯데의 모든 것은 박정태로 귀결될 정도였다. 그가 자이언츠가 아닌 다른 유니폼을 입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FA 자격을 취득한 2002년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왔다.

박정태는 롯데와의 FA협상에서 시작부터 끝까지 난항을 겪었다. FA 직전 2년간 저조했던 성적(타율 0.247, 0.262)이 발목을 잡았다. 3년-16억원을 원한 박정태의 바람과 달리 구단 측은 2년-6억원을 제시했다. 박정태는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고 싶었고, 롯데는 전성기가 지난 선수에게 큰돈을 쓸 맘이 없다며 무성의한 태도를 보였다.

양 측 모두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던 협상은 해를 넘겨 최종협상까지 이르렀다. 박정태가 2년간 10억원으로 자존심을 굽혔지만 그래도 구단 측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결국 박정태는 구단의 요구(2년간 6억원)대로 계약서에 싸인을 마쳤고, 계약기간만 뛴 뒤 미련 없이 현역 유니폼을 벗었다.

예비 FA 조성환, 하필이면...

조성환의 프로 생활도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1999년 2차 8순위로 입단한 그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선수였지만 박정태의 백업요원으로 활약하며 점차 기량을 키워나갔다.

공교롭게도 2002년 FA를 앞둔 박정태의 부진이 계속되자 기회를 잡게 된 쪽은 다름 아닌 조성환이었다. 이듬해 조성환은 자신의 잠재력을 폭발시키며 타율 0.307 6홈런 38타점 23도루를 기록했다. 박정태의 FA 계약으로 인해 매끄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롯데 2루수 계보는 조성환이 자연스럽게 물려받았다.

하지만 2004시즌 도중 프로야구계를 강타했던 병역비리 사건이 터지며 조성환의 고난이 시작된다. 6개월의 실형을 복역한 조성환은 2006년부터 군복무 해결을 위해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했다. 그의 파릇했던 20대는 그라운드가 아닌 사직구장 관중석에서 흘러갔다.

2008년 로이스터 감독의 부임과 함께 조성환도 4년 만에 팀에 합류했다. 이미 그의 나이는 서른을 넘긴 상태. 그러나 뒤로 물러설 곳이 없었다. 아직까지 자신의 야구를 불태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로이스터 감독의 'No fear(두려움 없는 야구)' 정신은 조성환에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이 해에 조성환은 타율 0.327(4위) 10홈런 81타점 31도루로 롯데 열풍의 한 가운데에 서있었다. 팀은 8년 만에 가을 잔치 티켓을 따냈고, 조성환도 생애 첫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기쁨이 배가됐다. 2009년에는 정수근에 이어 주장직을 맡았고, 지난해에는 다시 한 번 3할 타율(0.336 8홈런 52타점)을 기록하며 두 번째 황금 장갑을 손에 끼웠다.

하지만 조성환의 열정도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올 시즌 뚜렷한 노쇠화로 성적이 눈에 띄게 떨어졌고, 최근에는 옆구리 담 증세로 경기 출전마저 힘겨운 상황이다. 지난 3년간 이대호 다음 가는 팀 공헌도를 세우고도 FA 직전의 부진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실 조성환의 연봉은 연차와 이름값에 비춰봤을 때 의외라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2008년 팀에 복귀할 당시 7,000만원에 계약한 그는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고도 100% 인상률(1억3,000만원)을 적용받지 못했다. 이후 지난 시즌 연봉은 동결, 그리고 올 시즌도 두 번째 골든글러브를 안고 협상테이블에 앉았지만 38.5% 인상(1억8,000만원)에 그쳤다. 과거 수차례 선수들에게 실망감을 안긴 롯데의 '통 작은' 결정이 FA 조성환에게 해당되지 말란 법도 없다.

조성환은 이제는 전설로 회자되는 박정태의 "무조건 이긴다!"를 지켜본 현역 유일의 롯데 타자다. 2000년 임수혁이 심장 부정맥으로 2루에서 쓰러질 당시 타석에 들어서 이 장면을 지켜본 이도 조성환이다. 최근 가을잔치에 꼬박 참가하는 팀 내에서도 적지 않게 공헌했고, 무엇보다 팀을 이끄는 주장이었다.

근성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롯데 산증인에게 과연 구단은 시즌이 끝나고 어떤 대우를 해줄지 관심이 모아진다.[데일리안 스포츠 = 김윤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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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객원기자-넷포터 지원하기 김태훈 기자[ ktwsc28@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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